한국리서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는 “오늘이 과거를 다시 창조한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과거는 자랑거리도, 조롱거리도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다시 만든다는 신념을 갖고자 합니다. 내일은 기다림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삶은 내일을 준비하는 연속이라고 늘 다짐합니다. 조사를 통하여, 진실된 새로운 가치를 고객, 사원, 이웃, 사회, 인류에게 기여하는 것이 저희의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명과 신념을 갖고, 고객에게는 가치를, 회사에게는 성장을, 사원에게는 행복을 드릴 수 있는 경영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잘못한 무수한 것 중에서 7가지
1981년 여름 오후, 서울역 맞은편 L기업의 중역 회의실로 모조지 전지에 작성한 소비자 조사 결과 차트를 들고 들어갔다. 티크의 중후한 기품이 풍기는 대 회의실은 50여명의 임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소비자들이 치약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깨끗하게 닦이는 것, 그 다음 충치예방, 사용 후의 개운함, ......... 그리고 향은 가장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중 가장 상석인 것 같은 자리에 앉은 임원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치약에서 향이 얼마나 중요한데! 뭐, 이런 자료가 있어!"
"향은 5점 척도 중요도에서 3.21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은 처음부터 엉망이 되었다.
소비자의 마음도 고객의 심정도 헤아리지 못하던 시절, 숫자와 숫자를 연결하여 현실을 엮어내기는 커녕,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숫자를 무슨 진리인 양 우겨대던 32세의 약관 리서처의 얼굴은 화끈거리기만 했다. 그 임원이 오랫동안 치약의 세제 냄새를 지우기 위하여 여러가지 향을 배합하는 실험을 해왔던 사실을 나는 몰랐다. 치약 공장 한 번 가보지 못하였고, 치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도 몰랐다.
왜 이렇게 답하지 못하였을까?
"이 조사 결과를 보면, 소비자는 아직 치약에서 좋은 향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쁜 냄새만 나지 않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치약의 좋은 향은 이제부터의 시장이라고 봅니다"
리서처는 기업과 소비자의 가교 역할을 하여야 한다. 양자의 소통을 도와야 한다. 그러자면, 소비자만 알아서는 별 소용이 없다. 기업도 알아야 한다. 기업의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고민, 노력, 바람이 무엇인지 같이 느껴야 한다. 그래야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소비자 정보를 골라서 제시하고 쓸모 있는 전략을 제안할 수 있다.
제가 잘못한 무수한 것 중에서 7가지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벼 제초제 시장은 T라는 상표가 독점하고 있었는데, 전주 지역 태권도 대부이었던 김동성이란 굵직한 인물이, 몬산토의 마세트라는 제초제 두 봉지를 들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T는 전국 농약 도매상과 소매상 주인의 마누라 신발 사이즈도 알고, 어느 농약상 집이 냉장고가 필요하고, 어느 집이 텔레비전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유통력에 맞선 마세트 제초제 회사인 CHEMSTRAND (본사 이름은 MONSANTO)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농촌 마케팅을 교과서대로 시작하였다. 'Farmers Meeting'. 농약상 비위를 맞추는 대신, 농촌을 찾아 다니며 매일 수십 명의 농부들을 집단으로 만나, 마세트의 효능과 부작용 없음을 증명하고 다녔다. '실험 농가' (각 농촌 마을의 이장 집)에 마세트를 공짜로 주고, 회사 사원이 농부와 같이 마세트를 살포하였다. 벼 수확이 좋지 않으면 배상하여 주기로 각서도 써 주었다. 농민 신문에 광고도 하였다.
그런지, 7년 만에, 마세트의 시장 점유율은 70%를 상회하고, T회사는 한국에서 철수하였다. 제품의 효능 차이가 그 가장 결정적 원인이었지만, 처음으로 시작한 농민 마케팅의 쾌거이었다.
그 회사의 마케팅은 (고)이계홍 전무가 관장하고 있었다. 1982년, 덕수궁 옆, 세실극장 3층의 조용한 사무실로 갔더니, 이렇게 묻는다.
"노 사장, Retention이 뭐지? 본사에서 Retention Rate 자료를 내라고 하면서, 앞으로 사용자 비율보다 Retention Rate 올리는 데 더 노력을 하라고 하는데..."
"Retention이요? Intention 자료는 있지요. Intention Rate 아닌가요?"
둘이 같이 영한 사전도 찾아보았다. Retention이 뭘까?
지금은 모두 다 아는 용어이다. Retention Rate의 분모는 최근에 벼 제초제를 살 때 마세트를 선택한 사람의 수이다. 분자는 그 사람들 중에서, 다음 번에도 벼 제초제를 살 때, 다시 마세트를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의 수이다. 이것이 마세트의 Retention Rate이다. 비 내구재의 경우, Retention Rate가 70%를 넘으면 점유율 증대가, 40~60%이면 점유율 유지가, 46% 미만이면 점유율 하락이 예상된다. 그 대책을 지금부터 세워야 한다.
마케팅 조사에는 여러가지 복합지표가 있다. 최초상기율, 최근구매율, 향후 구매의도율 등이 단순지표라면 재구매율, Retention Rate, 광고내용-상표 일치 기억율(正 인지율) 등은 복합지표이다.
소비자 조사나 여론조사 발표에서 가장 쉬운 통계값이 %이다. %를 표시할 때에는 반드시 _____중에서 몇%라고 그 분모를 밝혀야 한다.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률이 0.046%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 이런 것은 엉터리 %이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도대체 무엇인가? 교통사고가 100건 났는데, 그 사고 중에서 사망한 사람이 생긴 사고의 비율인가? 일년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의 숫자인가? 혹은 전체 사망자 중에서 일년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의 비율인가?
%, 비율 등은 반드시 그 분모와 분자를 명료하게 (애매하지 않게) 표시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재구매율", "구매의도율", "광고-상표 정인지율" 등의 지표를 발표할 때, 리서처조차 그 공식(분모와 분자)을 모르는 경우가 없지 않다. 더욱이, 상표 충성도와 같은 애매한 (그럴 듯한)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아예 공식이 없는 경우도 있다.
제가 잘못한 무수한 것 중에서 7가지
1980년대 초. "리본"표 마요네즈는 당시 남대문 시장의 PX 상품 중에서 인기있는 식품이었다. 불법유통 상품인데도 불구하고 전체 마요네즈 중에서 20% 정도의 점유율을 보이는 유명 상표이었다. 그 회사(Knorr)가 '미원'과 합자법인을 만들어 한국에 진출하였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수프와 마요네즈 레시피 (recipe)를 발견하고자 끊임없이 소비자 조사를 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인의 취향에 맞는 죽 제품을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concept & product test를 준비하는 회의를 열었다. 회의 중에 갑자기 김병섭(당시 나라기획 대표, 31세) 대표가 느닷없이,
"이게 Product concept입니까? 광고 concept입니까? 라고 묻는다.
다들 멍하니 김 대표를 쳐다보았다.
"글쎄..."
"두 가지가 다른가?"
한 사람은 Knorr 본사에서 파견된 스위스 사람 마케팅 이사, 나는 그런대로 마케팅 조사 꽤나 안다는 리서처. 김 대표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김대표는 일류대학교를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20대에 미국 부대에서 근무하여 영어를 아주 잘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거의 최초 광고 전문가로서 그의 지식, 경험, 고민은 남달랐다. 30년 전의 '진짜' 마케팅 이야기이다.
지금도 우리는 Product concept 와 Ad concept를 혼동하고 있다. 제품 개발을 위한 C&P Test에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이 Product concept 이다. 그 제품의 특징, 재료, 다른 제품과의 차이점을 소비자에게 쉽게, 간결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Concept & Product Test에서 소비자에게 보여주는 concept는 제품 특징이어야 한다. 그래야 제품 개발과 관련이 된다.
광고 카피를 보여주었다가는 제품 개발이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물론, Product concept와 광고 카피가 일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MASOK 회원 중 한 명이 개발한 화장비누, "미끈거리지도 땡기지도 않는 비누"는 제품 특징과 광고 카피가 일치하는 경우이다(바보들의 주장으로 그렇게 광고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제품 특징을 주장하지 않고 (대개는 특징이 없어서) 감성적인 호소를 하는 광고는 모두 제품 concept는 없고 광고 카피만 튈 뿐이다.
제가 잘못한 무수한 것 중에서 7가지
외제 담배의 수입과 판매가 허용된 지 3년쯤 후의 이야기이다. 한국리서치는 그 회사를 위하여 담배 소매점 판매량 조사를 매월 보고하고 있었다. 조사 결과 프리젠테이션을 마치고 그 회사의 회의실에서 외국인 (아마 미국인) 담당 임원을 만났다. 둘만 있었다. 그 외국인 상무는 인자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보고서 숫자가 고쳐졌던데, 오늘 보고는 12.6%이고, 내가 받은 보고서에는 16.2% 이던데"
"오타입니다. 12.6%가 맞습니다. 보고서를 고쳐서 다시 보냈었지요."
"알아요. 하지만, 나는 첫 번 보고서에 있는 숫자를 이미 본사에 보고하였었습니다. 한국리서치는 벌금(penalty)을 내야 합니다."
나는 웃었다.
"벌금, 내지요"
그 사람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벌금이 2,400 미 달러란다. 이 사람, 농담도 잘 하네. 그 웃음 속에 유머가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서양 사람들은 유머를 잘해"
2,400 불이면 그 조사의 한 달 용역비이다. (지금 돈으로 1,000 만원 정도 된다).
"아, 내지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데, 그 서양인 임원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진다.
"농담이 아닙니다. 벌써 보고하였고, 이런 경우, 한 달 용역비의 penalty를 요구하는 것이 우리 회사의 policy입니다."
기가 막혔다. 아니, 숫자 하나 잘 못 타자 쳤는데, 한 달 용역비를 내라고! 어쩌지. 하루 하루 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사원들 인건비도 제때 지급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penalty를 낸 돈도 회사에 없었다.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달 세금계산서는 발행하지 못하였다.
거래가 끊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야박하고 도둑놈 같았지만 생각할 수록 고마운 생각도 들엇다. 그래도 조사 용역 계약은 지속하자는 것이었으니까. 자본주의, 상업주의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단골은 늘 두렵다. 10 번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망한다. "한국리서치 괜찮은 회사인 줄 알았는데, 실수가 많더라구요." 이런 말 한마디가 그 고객 뿐만 아니라, 다른 고객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은행의 VIP도, 백화점의 다액 구매자도 그렇다. 서비스 업 만이 아니다. 제조업에서도 한 명의 고객을 잘 못 응대하였다가 시장 점유율이 곤두박질 치는 사례가 간혹 있다.
상업성(commercialism)은 공정한 거래를 뜻한다. 상업성의 결과는 서로 단골이 되는 것이다. 양자에게 모두 도움이 되는 교환의 연속이 상업성일 것이다.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신용이다.
제가 잘못한 무수한 것 중에서 7가지
FMCG (fast Moving Commercial Goods) 대기업의 임원회의에 소비자 및 딜러 만족도 측정 구두보고를 하러 갔다. 조사자료도 깨끗하고, 앞뒤가 어울리는 해석도 하고, 필요한 제안도 하였다. 그런데, 신임 사장이 갑자기 고객만족과는 상관없는 질문을 한다.
"빌보드 광고 효과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아, 예. 빌보드 광고는 FMCG의 경우, 그 효과가 적습니다."
갑자기 회의실이 조용해 졌다. 바로 앞에 앉아있던 마케팅 상무 표정이 일그러진다. 프리젠테이션을 마치고 같이 나왔다. 평소에 꽤 친한 사이다.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곤, 그 회사의 조사 요청이 더 이상 없었다.
아주 나중에 안 사실이다. 그 임원회의에서 조사 구두 보고회 바로 전에 빌보드 광고의 효과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한 쪽은 빌보드 광고의 비용이 많이 드니 중단하자는 의견이고, 다른 한 쪽은 하던 것인데 계속하자는 주장이었다. 신임 사장은 회장이 빌보드 광고 좋아하니까 그냥 하자고 대충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리서처는 데이터가 없으면 "모른다"고 하여야 한다. 괜히, 자료도 없는데 아는 척하거나, 구두 보고회에서 높은 사람이 질문한다고 해서 (나를 인정하는 기분이 들어서) 껍죽대고 잘난 척 해서는 안된다. 리서처는 컨설턴트가 아니다. 컨설턴트라고 해도,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된다.
마케팅은 그 기업의 전체 사업 활동의 일부분이다. 마케팅 조사는 더욱 작은 부분이다. 그 기업의 사업도 그 기업의 신념, 미션, 장기적 전망 속에서 계획되어야 한다. 그러한 신념과 미션은 기업 주인의 철학이다. 이것이 한 상품의 마케팅보다 더 중요하다.
나는 그 이후로 광고에 대하여 신념을 갖고 있다. 광고비가 100이라면, 70은 소비자를 대상으로 "매출 증대를 위한" 광고비로 사용되어야 한다. 20은 사원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기업이미지 광고나 기업의 미래 전망을 PR하는데 쓰여져야 한다. 나머지 10은 기업의 주인을 위하여 배정되어야 한다. 기업의 주인이 기분이 좋으면, 사원들에게 잘해주고, 사원들이 기분 좋으면 소비자에게 잘 대한다. 작은 음식점이 그러한데, 수 천명의 사원이 있는 대기업은 더욱 그러하다. 기업 주인의 사업상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여야 한다.
제가 잘못한 무수한 것 중에서 7가지
우리나라 인스턴트 커피 시장에서 대격전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좀 산다는 가정의 주부들이 남편보다 더 좋아하는 커피가 있었다. 80년 중 후 반에 남대문 도깨비시장, 동대문 방산시장 외제 식품 가게에서 비싼 가격에 팔리던 커피이다. 정식 수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장점유율 30%를 기록하던 명품이었다. 그 커피 회사가 국내에 진출하였다. 국내 커피 회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준비하던 차이다.
"과연 T 커피 제조 회사가 국내에 정식으로 진출하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맛도 향도 소비자들이 더 좋아하는데, 더욱이 그 회사는 소비재 마케팅의 귀신이라고 하던데..."
국내 회사는 '함대작전 (Fleeting strategy)'을 펼쳤다. 그 외제 커피는 지금까지 잠수함이었으나, 이제는 바다 위로 떠오르는 강력한 공격함처럼 보였다. 여러가지 커피 상표로서 함대를 이루어 포위 공격하자, 맥주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있었다. 함대의 전함들 중 몇 대는 부서져도 좋다. 상대방에게 타격만 줄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2년쯤 지나 다른 전함은 모두 침몰하고, 결국 1:1의 대결 구도가 되었다.
"시장점유율 50%를 밑돌면, 우리는 망한다. 50%를 지켜야 한다. 지금 점유율은50.0%에 가깝게 내려앉고 있다. 가격을 내려야 해. 소비자들의 선호도도 우리가 약하잖아."
가격탄력성 조사를 하였다. 경쟁 상표 대비, 가격 하락에 따른 점유율 예측 조사이다. 10% 이상 가격차이가 나야, 소비자들의 선택이 지속될 것이라는 조사결과이다. 마케팅 팀은 조사자를 데리고 회장님 사무실로 갔다. 영업에서도 지원사격 차 회의에 참석하였다.
"저희가 4,200원, 경쟁사가 4,800원 일 때, 점유율을 지킬 수 있고 이윤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회사를 20년 전에 설립한 회장님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계셨다. 그 분은 대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마케팅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만 하였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그리고 더 비싸게 받아!"
우리는 회장님의 진지한, 진솔한 표정과 어투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한마디도 반론을 펴지 못하였다.
지금 그 커피 회사는 80%의 시장 점유율을 구가한다. 이 기업은 아마 우리나라 대기업 중에서 사원의 근속 기간이 가장 길고, 가장 건실한 재무구조와 이윤구조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 회사의 마케팅 전무는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한다.
"가격 5% 올리고, 점유율 3% 늘리자"
회사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안다고 한다. 공장에서 커피 만드는 사원도, 소매점 판매 사원도, 연구소에서도 그 목적을 위하여 본인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안다고 한다.
'더 좋은 품질로 더 높은 가격을 받는다'. 자본주의, 상업주의가 환경이 한, 그 철학은 진리일 것이다. 그 진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제가 잘못한 무수한 것 중에서 7가지
국내 굴지의 백화점이 서울 외곽도시에 백화점 출점하고자 하였다. 타당성 조사이다. 상권의 구조는? 타겟 고객의 특성은? 기존 중견 백화점 고객의 유치 방법은? 상품 구색은? 층 별 상품 포지숀은? 주차장 규모? 셔틀버스의 효과? 이런 것들이 조사되었다.
조사 자료를 설명하고, 백화점 임원들과 토론도 하였다. 여러가지 아이디어도 많이 나왔다. 보고회는 끝났다. 그런데, 백화점 사장이 넌지시 묻는다.
"백화점 지을 자리에 가 보셨습니까?"
못 가보았다. 조사를 수행한 연구진들은 가 보았지만, 막상 조사 결과를 발표한 내가 가보지 못하였다. 백화점 사장님이 아주 정중하게 묻는 이유가 짐작된다. 실감나는 이야기를 못 한 것이다. 숫자만 늘어놓은 것이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못 가 보았습니다"
판단은 끝나버렸다. '조사를 잘 해 주어서 고맙지만, 너하고는 다시 안 만난다'. 아마 그 사장님 마음속에는 이미 그런 생각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마케터이던 리서처이던, 그가 다루는 것이 눈에 보이는 제품이든, 서비스이든, 본인이 사용해보지 않고서는, 직접 보고 냄새맡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시작할 수 없다. 시작해서는 안된다. 특정 회사 신용카드의 소비자 조사를 하기 전에 리서처는 직접 그 회사의 신용카드에 가입하여 보고 사용해 보고 청구서를 받고 대금을 지불해 보아야 한다. 남자 리서처가 여자 위생대 조사를 꼭 하여야 한다면, 본인이 사용해 보아야 한다. 적어도 자기 처에게 사용하도록 하고, 직접 관찰하고 느껴야 한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목에 걸리지 않는 연기"를 느낄 수 있으면, 맥주를 마셔보지 않은 광고인이 "목욕 후 맥주 한 잔의 거품"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식은 지식에 불과하다. 체험이 없는 지식으로 주장만 하면 오히려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제각기 좀 다르다. 그러나,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체험한 사람들 간의 차이보다 몇 배 더 크다. 머리 속의 생각, 아이디어, 컨셉트... 이런 것이 마케터를 허황된 존재로 만들고 리서처를 바보로 만든다.
CEO 에세이
그는 ‘58년 개띠’다. 서울 명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더 좋은 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마케팅 부서에 배치돼 선배들과 신제품을 출시하고 성공시키면서 승진을 거듭해 입사 20년 만에 임원이 됐다.
임원 재직 3년 후 계열사 사장이 됐다. 계열사는 외국 회사의 지분이 더 많은 합자법인으로 그는 외국인 주주의 지명을 받아 대표이사가 됐다. 그리고 3년 후 54세가 되었을 때 사직했다. 아니, 잘렸다.
처음 6개월은 놀았다. “요즘은 백수가 더 바빠!” 그리고 채용 알선 회사를 통해 여러 곳에 지원서를 내고 여유 있게 기다렸다. 학력과 경력은 화려했고, 그가 성공시킨 신제품들은 지금도 시중에서 시장점유율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면접 보자는 회사가 없었다. 대표이사 사장을 지낸 ‘죄’ 때문이다. “사장까지 하신 분을 모시기가 좀….” 그는 “임원도 좋습니다”라고 했지만 연락이 안 왔다. ‘창업을 해야지. 하지만 퇴직금은 안 쓴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인적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는 벤처기업에 취업했다. 직함은 대표이사. 요즘 정보기술(IT) 관련 창업을 한 젊은이들은 돈이 없다. 그가 조금씩 자기 돈을 넣었다. 그리고 2년, 매출액이 ‘0’이다. 또 다른 젊은 기업에 고문이란 직함으로 들어갔지만 결과는 같았다.
진지하게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해서 필자와 만났다. 그는 “3년을 이렇게 보내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5, 6년 일하면서 직원들이 올린 서류를 결재하고, 마케팅 생산 개발 재무 부서 간의 의견 조정은 많이 했지요. 그러나 그런 경험이 새로운 사업을 성공시키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제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기업의 임원이었을 때 ‘갑’으로서의 행세만 할 것이 아니라 ‘을’에게 잘 해줬어야 한다는 반성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속한 기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퇴직 후의 생활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갑에게는 많은 을이 있다. 그중에서 두세 개 기업을 염두에 두고 그 기업의 내부 사정, 성장 가능성, 대기업과의 관계를 면밀히 파악하고, 친밀감을 돈독하게 해두면 퇴직 후에 그 기업에 고문으로라도 취직해 지금 기업과의 사업관계를 지원하고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을에게 특혜를 줘야 한다는 게 아니다. 갑과 을, 양쪽 기업을 동시에 이해하면 양사 모두를 위한 제품과 서비스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게 그가 깨달은 교훈이다.
노년에 국민연금과 퇴직금만으로 사는 것은 재미가 없다. 가끔 가족으로부터 독립해 친구들과 놀러 갈 수 있는 건강을 평소에 챙기면서 용돈도 벌어야 한다. 손자들 재롱만 보면서 노년을 보내면 사람이 비굴해질 수 있다. 아내가 차려주는 식사만으로는 노년의 공허감을 채울 수 없다. 그런 나의 삶은 억울하다.
노년이 되어서도 대가를 받으면서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고 있는 바로 지금, 퇴직 후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곳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내가 누군데’라고? 퇴직 후에는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2015년 7월
CEO 에세이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고 표정과 냄새를 맡아야 이해가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난다.
뒤에서 택시가 오는 것도 모르고 문자를 보내고 받는다. 건너가는 길 가운데에서도 휴대전화에 몰입하는 사람도 있다.
카톡·휴대전화메시지·e메일·유튜브·페이스북…. 하루에 수백 건의 소식·전달·농담·하소연이 들어온다. 회사 안에서도 사원들은 컴퓨터 한쪽에 무슨 링크를 열어 놓고 업무 연락도 하고 사사로운 속삭임도 나눈다. 편리한 세상이다. 수십 명, 아니 수천 명에게 한꺼번에 문자를 보내고 받는다. 신혼부부가 잠자리에서 서로 문자 메시지로 오늘 밤의 거사 진행을 의논한다는 농담도 있다.
편리하다. 빠르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즉시 문자로 연락하고 사진도 보내고 동영상도 보낸다.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백 번 이런 소통을 하고 있다. 쑥스러운 부탁이나 하기 어려운 말을 문자로 보내면 마음이 덜 불편하기도 하다.
카톡으로 여러 사람과 한창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 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렇게 전화로 하니까 금방 해결되는 것을, 카톡으로 하니까 마무리가 안 돼요. 역시 전화로 해야 해요.” 그의 말이 맞다. 중요한 사항은 최소한 전화라도 해야 한다.
어느 기업의 임원이 사원들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 “고객에게 e메일을 보내고 할 일을 다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e메일은 상대방에게 내가 이런 일로 만나고 싶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지, e메일로 고객과의 거래를 성사시키고자 하면 안 됩니다.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얼굴을 보면서 서로 이해하고 그의 표정을 보면서 주고받을 것을 흥정해야 합니다. e메일이나 메시지는 만나기 전의 사전 작업일 뿐입니다. 여러분, 연애할 때 카톡으로만 합니까. 상대방의 냄새도 맞고 살도 맞대야지요. 거래는 연애보다 더 어렵습니다.” 동감이 간다.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고 표정과 냄새를 맡아야 이해가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난다.
간부 사원은 서류로 품의를 한다. 보고도 한다. 도움이 된다. 정리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나서 같이 그 서류를 보면서 그 사업의 목적을 재점검하고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상의해야 일이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
기업이 신제품을 기획할 때 마케팅 부서가 개발·생산·영업·재무팀과 반복해 회의를 열어야 시행착오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사장이 품의서만 보고 결정하면 그 후 분명 생각하지 못한 위험과 재난이 닥칠 것이다. 국가 정책에 관한 것은 더욱 그러하다. 많은 부처가 관련돼 있는 사항일수록 만나야 한다.
토론해야 한다. 서류는 죽어 있는 대화다. 믿지 못하는 사이라면 서류가 의사소통의 주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말로만 하면 “내가 언제 그랬어?”라니까. 그러나 서로 믿는 사람들끼리는 공적 업무든 사사로운 것이든 만나서 대화해야 한다. 그래야 더 좋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만 그 후의 액션 플랜은 반드시 서류로 만들어 공유해야 행동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나 서류가 사람들끼리의 후각과 촉감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사람도 짐승이기 때문이다.
2015년 7월
CEO 에세이
걷는 자세가 좋으면 멋있어 보인다. 스스로도 기분이 좋다. 자신감이 생긴다. 자세에서 마음이 생긴다. 소화도 잘된다. 호흡도 커진다. 내장이 건강하게 움직인다.
아침 출근길에 씩씩하고 활발하게 걷는 여성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 얼굴 생김새가 궁금하다. 두 다리가 일직선으로 뻗어 나오고 목이 곧고 가슴이 시원하게 제쳐 있고 허리가 반듯하게 펴진 모습에서 자신감이 배어 나온다. 일도 사업도 엄마 노릇도 잘할 것 같다. 반면 눈이 밑을 향하고 허리가 휘고 두 다리가 물 고인 곳을 피하 듯 옆으로 벌어지고 가슴이 좁아진 모습을 보면 어딘가 불행하고 초라해 보인다.
경찰청에서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여성 경찰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참석을 확인한 뒤 그 여성 경찰은 활달한 음성으로 “네, 형님”하고 전화를 끊는다. 내 나이가 일흔 살이 다 된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무척 기분이 좋다. 그 경찰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아직도 궁금하다.
활달한 목소리 만큼이나 자신의 매력을 발산시킬 수 있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걷는 자세다. 걷는 자세 하나 만으로도 호감이 생길 수도 있고 반대로 불쾌감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걷는 자세가 중요하다.
광화문 인근 뒷길에는 경찰이 유독 많다. 4명, 6명 무리를 지어 인도를 걷는다. 그런데 그 자세가 마치 허기에 주린 모습이다. 허리를 굽히고 터덜터덜 걷는다. 군화의 뒤축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날 정도다. 제식훈련도 받지 않았나 싶다. 잠시 후 두 명의 여성 경찰이 식당으로 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네 다리가 두 다리처럼 보인다. 가슴을 제치고 전방을 주시하는 자세다. 이런 여성 경찰도 있는데 남자 경찰이 저런 모습이라니 그들의 상사가 미워진다.
어린이·중년·노인·남녀 할 것 없이 걷는 자세가 좋으면 멋있어 보인다. 스스로도 기분이 좋다. 자신감이 생긴다. 자세에서 마음이 생긴다. 소화도 잘된다. 호흡도 커진다. 내장이 건강하게 움직인다. 서울의 한 정형외과 병원의 과장이 회사를 방문해 건강하고 아름답게 걷는 법을 가르쳐 줬다. 양쪽 귀·어깨·골반의 뼈가 일직선이 되도록 걸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시각이 자연스럽게 전방위 15도를 향하게 된다고 한다. 의식적으로 노력하라는 조언이다. 컴퓨터 앞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직장인 10명 중 이렇게 걷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안 된다고 한다. 거의 모두가 지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걷는데, 그렇게 걸으면 내장 활동이 둔화된다고 한다.
아랫배를 앞으로 힘껏 내놓아야 한다. 가슴은 뒤로 제칠 만큼 제친다. 흔히 아랫배가 나온 사람이 나온 배를 감추기 위해 배를 집어넣으면 허리가 휜다. 어깨도 앞으로 쏠리고 내장은 압박을 받게 된다. 가슴이 빈약한(남녀 불문) 사람이 그것을 가리기 위해 가슴을 모으면 어깨가 좁아지고 두 눈이 아래쪽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다.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 걷는 자세를 교정할 수도 있다. 아침에 샤워하기 전 기지개를 펴고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발뒤축을 들고 앉았다 일어 섰다를 20~30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긴다.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고 집을 나서 걸으면 가슴이 벌어지고 양 귀·어깨·골반의 뼈가 일직선이 되는 느낌이 든다.
상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슬쩍 보게 된다. 썩 괜찮은 놈인 것 같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 아닌가. 음주 후 귀갓길에서도 한 번 시도해 보면 어떨까.
2015년 6월
CEO 에세이
사소한 것 같지만 일선이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호소와 건의로부터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파악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회사의 제도가 개선될 수 있다.
근속 12~36개월 된 사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사고과 원칙을 잘 모르겠다. 의자에 문제가 있는데, 새것으로 바꾸어주지 않는다. 업무 공간이 좁다. 이런 불평을 또 듣기 싫었지만 연초에 약속한 일이라 간담회를 가졌다. 사전에 네 가지 주제를 줬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좋았던 것’, ‘일하면서 불편한 것’, ‘본인의 역량을 증대하기 위한 지원 요청 사항’, ‘회사 운영상 건의하고 싶은 것’. 불평불만만 쏟아 놓을 것 같아 회사의 좋은 점을 첫째 주제로 요구했던 것이다. 듣기만 하자. 꼭 필요한 설명이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말자. 특히 그 자리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자. 이런 각오를 하고 20명씩 세 그룹으로 나눠 3일 동안 하루 2시간 정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첫째 발언한 사원이 회사의 좋은 점을 먼저 이야기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좋은 점은 그냥 형식적으로 말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문제점이나 건의 사항을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말문을 열고 각오한 바처럼 듣기만 하면서 공책에 자세하게 적어 나갔다. “제품 테스트 공간이 부족해요. 식품 테스트할 때에는 부엌 시설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휴게실에서 하니까 냄새도 나고 고객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관찰실의 녹화 화질이 HD 수준인데, 고객은 풀 HD 영상을 원해요”, “업무와 직접 관계없는 책도 회사에서 빌려 주거나 사 주면 좋겠습니다. 사장님이 소설을 읽으라고 했잖아요”, “수습 기간에는 멘토가 있었는데, 그 후 멘토 체제가 없어요. 물어 볼 것은 많은데”, “상급자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팀에는 대리만 4명 있고 그 위에는 이사님만 있어요.” 이런 이야기들이다. 부서장들이 건의하는 투와 사뭇 다르다. 부서장들은 “풀 HD 시설이 있어야 합니다”, “갱 서베이(Gang survey) 시설을 개선해야 합니다”, “사내 기밀 서류를 등급화해야 합니다”라는 식의 표현이다. 관념적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일선에서 일하는 어린 사원들의 이야기는 현실이다. 현장감이 있다. 제안이 아니고 호소다. 당장 고치고 만들고 지침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와드득 난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간담회 후 필자의 행동을 자제했다. 부서장들의 의견을 다시 듣고 행동 지침과 일정을 잡아야지, 어린 사원들의 말만 듣고 수백 대의 컴퓨터 기능을 올리거나 건물 밖에 별도의 창고를 빌리라고 하거나 독서 통신에 요청하는 개인 도서의 범위를 확대하면 회사 의사소통의 채널이 무너질 수 있다. 사장은 부서장을 가장 존중한다는 모습을 다시 보여 줘야 한다. 부서원들은 사장의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부서장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발언을 인사팀에 정리해 부서장들에게 전달하라고 하고 행동은 해당 부서장들의 의사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며칠을 보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일선이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호소와 건의로부터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파악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회사의 제도가 개선될 수 있다. 그들에게 직접 아무 언질도 주지 않고 있다가 한두 달 후 업무 공간, 시설, 장비, 매뉴얼, 운영 지침이 가시적으로 개선된다면 그들은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들이 기뻐할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반기에는 과장급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2015년 2월
CEO 에세이
그는 매일 새벽 5시부터 강남구 부유층 아파트의 빵집 5군데에서 이렇게 식빵을 차에 싣는다. 그런 후 사무실에서 그 식빵 봉지를 꺼내 한 덩어리씩 고운 종이로 다시 포장해 마포의 산동네로 차를 몬다. 혼자 사는 노인들의 아침 식사 대용이다.
새벽 5시,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최고급 아파트 단지 타워팰리스의 한 빵집 현관 밖. 검은 비닐봉지에 든 무엇인가를 차에 싣는 남자가 있다. 그는 털털거리는 자가용을 운전해 서초동 또 다른 빵집 현관으로 가 역시 검은 비닐봉지를 차에 싣는다. 그것은 식빵이다.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이며 어제 팔다 남은 식빵이다. 그는 매일 새벽 5시부터 강남구 부유층 아파트의 빵집 5군데에서 이렇게 식빵을 차에 싣는다. 그런 후 사무실에서 그 식빵 봉지를 꺼내 한 덩어리씩 고운 종이로 다시 포장해 마포의 산동네로 차를 몬다. 혼자 사는 노인들의 아침 식사 대용이다. 홀몸노인들의 집에는 현관이 없는 곳도 있다. 현관 대신 길고 넓은 두꺼운 천이 부엌 겸용 작은 마루를 길가의 먼지와 바람으로부터 막아주고 있다.
“이런 일을 매일 한다고요?” “네.” 진짜일까? 그래서 다음 날 타워팰리스 빵집 앞으로 5시 조금 전에 가 봤다. 컴컴한 새벽에 그가 온다. “어, 이게 뭐예요?” 대답이 없다. 검은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달랑 세 덩어리의 식빵이 있다. 안 팔린 더 맛있는 빵도 많을 텐데…. “식빵밖에 안 줘요?” “다른 빵들은 빵집 종업원들이 가져가곤 해요. 노인들에게 너무 달기도 하고요.” 그렇구나. 그다음 빵집을 같이 가보고 또 가봤다.
그는 늘 회색 옷을 입는다. 10년도 더 된, 만날 때마다 같은 옷인 것 같다. 주름이 없는 통바지에 단추가 5개 달린 약간 두툼한 점퍼 같은 차림이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스님 복장이다. 그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거의 없다. 수십 개의 가늘고 긴 머리카락이 간신히 두개골을 덮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늘 모자를 쓴다. 그 모자도 회색 비슷하다. 스님인 줄 알았다. 그 모습에서 적어도 불자라고 여겼다. “이 빵을 어디에서 다시 포장해요?” “제가 다니는 교회 사무실에서 해요.” “어느 교회인데요?” 뜻밖이었다. 그가 말한 교회는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대형 교회다. 그렇게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한다고? 그 교회는 바로 우리 집 옆에 있다. 잘사는 사람들이 오는 교회다.
크리스천이라고? 그것도 그렇게 큰 교회의? 이렇게 가난하고 스님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와 친구가 됐다.
다른 친구가 라오스에 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그 스님처럼 보이는 기독교인과 같이 라오스에 갔다. 산에도 같이 갔었다. 그는 통 말이 없다. 그런데 불편하지 않다. 그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는 “그 사진 좀 보고 싶은데요.” 말없이 휴대전화를 넘겨준다. 사진이 아름답다. 꽃 사진이 많다. 새벽 사진, 강물 사진, 아이들 사진도 있다. 구도도 좋고 선명도도 좋다. “허, 이런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구나!”
그가 우리 로타리클럽 20주년 기념 책자 출판을 맡았다. 출판사를 한단다. “아니 요새 출판사?” 로타리클럽의 다른 회원이 “임 사장은 사업도 잘해요.” 그는 발로 뛰면서 11월 말까지 회원들에게서 사진·기록·수필 등을 모았다. 12월 27일 책이 나온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빨리할 수 있어요?” “해야지요.” 그리고 1주일 후 600면이 조금 넘는 가제본된 책을 가져왔다. “내일모레까지 원고를 수정할 게 있으면 수정해 파일로 보내주세요.” 기가 막힌다. 편집 회의를 주관하는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표정이다. 단단하다. 원고를 부탁하고 점검하는 모습에서 강인함이 느껴질 정도다. 그에게 감사한다. 그는 임병해란 이름의 사람이다.
2014년 12월 31일
CEO 에세이
조금 덜 받고 그 대신 조금 더 일하자. 제품의 생산원가를 줄일 수 없으니 사원들과 힘을 합해 시간외 근무라도 더 하자. 당분간 수당 지급을 유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망하지는 말자. 조금 더 가난해질 뿐이다. 모두가 같이.
한국의 가장 큰 기업의 휴대전화 세계 시장점유율이 하락하고 있다. 그 주식 가격은 150만 원까지 상승하다가 110만 원대로 하락, 최근 120만 원을 간신히 넘었다. 한국의 가장 큰 자동차 회사는 강남 부지 매입에 10조 원을 쏟아붓는다고 한다. 경쟁 그룹의 예상 입찰액보다 4조 원 이상이 많은 금액이다. 통 큰 결단이라고 하지만 불안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면서 미국 법원에서 1억 달러의 벌금을 통지 받았고 벌금 이외 미국 정부에 지불해야 할 금액이 2억 달러가 넘을 것이란 소문이다. 서울시 강남 지역에 거대한 타운을 건설하고 있는 그룹을 제외하고 2014년에 한국에서 이들 대그룹의 눈에 띄는 투자도, 성장도, 제품도 보이지 않는다. 11월 들어서는 우울한 소식들뿐이다. 어디에서도 한국 대기업의 성장에 관한 소식을 접하기 어렵다.
한국 5대 그룹의 경제 영향력은 50%를 넘는다. 숫자만이 아니다. 필자가 일하는 회사의 매출액 중에서도 5대 그룹으로부터 수주 받는 금액이 30%가 넘는다. 5대 그룹에 부품을 공급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만 개의 중견기업과 소기업의 사장들은 언론에 보도되는 한국 대그룹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불안하다. 아, 내년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중견기업인 우리 회사는 어디에서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할까. 성장은 아니라도 생존이라도 해야 할 텐데 비빌 곳이 보이지 않는다.
내년에 무엇을 먹고살지…. 대기업으로부터 발주 받는 금액이 떨어지면 큰일인데, 늘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줄 것 같아. 어디에서 줄어드는 매출을 채울 수 있을까. 불가능해. 그룹을 대신해 우리에게 일감을 줄 기업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그룹의 영향은 동네 골목의 작은 음식점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대그룹의 성장이 부진하면 중견기업과 소기업의 매출이 떨어지고 회사는 사원들에게 지급하던 모든 비용을 감소시킬 수밖에 없다. 이제 그들은 비싼 고깃집이나 횟집에서의 회식은 생각하기 어렵다. 점심으로 7000원짜리 갈비탕을 먹다가 5000원짜리 칼국수를 먹는다.
그래도 돌파구를,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한다. 오늘부터 간부 사원들과 ‘커스터머 저니(customer journey)’를 떠나자. 근사한 용어를 갖다 붙여야 사원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하는 말이지, 거의 구걸하러 다니는 영업 행각을 시작해야 한다.
한 팀당 한 달에 한 개의 목표 신규 고객을 정하고 모든 사적인 인맥을 동원해 면담 약속을 받고 우리 회사가 그래도 조금 차별적 우월성을 갖고 있는 제품을 그들에게 설명하자. 대기업이 아니라도 좋다. 중견기업에 그들이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을 제안하자. 그보다 더 큰 가치를 약속하고 계약하면서 중견기업의 시장을 뚫어야 한다. 가능할까.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계단의 처음과 끝을 보지 마라. 그냥 한 발자국을 내디뎌라”고 했다. 따라해 보자. 중견기업끼리의 동맹을 맺어보자. 조금 덜 받고 그 대신 조금 더 일하자. 제품의 생산원가를 줄일 수 없으니 사원들과 힘을 합해 시간외 근무라도 더 하자. 당분간 수당 지급을 유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망하지는 말자. 조금 더 가난해질 뿐이다. 모두가 같이.
2014년 11월 19일
CEO 에세이
69세의 나이에 발표한 ‘나는 학생이다’라는 자서전 비슷한 글에서 왕멍은 4무의 삶을 소개한다. 무술(無術)·무책(無策)·무공(無功)·무명(無名)이다. 술책과 꾀를 부리지 않음. 소위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적과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멍은 중국인, 1934년생, 지금 80세다. 14세(1948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지하 당원으로 활동했고 22세에 발표한 소설 ‘조직부에서 온 청년’이 우파적이라고 낙인 찍혀 29세에 신장 위구르로 유배당해 작품 활동이 금지됐다. 그 후 3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16년 동안 위구르에서 유배 생활, 1979년(45세) 복권 조치를 받아 50 초반에(1986~1989년) 중국 문화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문학 노벨상 후보자로 매년 거론되기도 한다.
그가 69세의 나이에 발표한 ‘나는 학생이다’라는 자서전 비슷한 글에서 왕멍은 4무의 삶을 소개한다. 무술(無術)·무책(無策)·무공(無功)·무명(無名)이다. 술책과 꾀를 부리지 않음. 소위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적과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이야!”라고 말하지도 않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음이다. “유명해지는 것은 피곤한 일, 내 이름을 알리면 삶이 추해진다”는 신념이다.
사업이나 장사를 하면 그 브랜드를 알려야 한다. 소비자는 유명한 브랜드에 대해 그 품질을 믿고 그만큼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한다. 조직에서 독자적인 기술 개발, 탁월한 영업 확장, 신제품 성공 등의 실적을 낸 사람에게는 그 공적을 인정해 포상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는 왕멍의 무공·무명을 본받으면 어떨까. 아주 작은 일에서도 말이다. 아침에 아파트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니 바닥에 물이 빠지지 않는다. 수채 구멍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고 그 속의 쇳덩어리를 빼 보았더니 머리카락이 잔뜩 뭉쳐 있다. 그것을 덩어리 째 빼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물이 콸콸 빠진다. 아침을 먹는 사이 아내가 화장실에서 “어, 어제는 막혔는데, 물이 잘 빠지네”라고 한다. “그것 내가 들어 올리고 머리카락을 빼서 그래”라고 말할까 아니면 그냥 웃고 말까. 친구가 맥줏집에 휴대전화를 두고 나간다. 그 휴대전화를 갖다 주면서 “야, 휴대전화 놓고 가면 어떻게?” 하고 건네줄까 아니면 휴대전화를 맥줏집 계산대 아가씨에게 맡기고 “찾으러 올 테니 갖고 계세요”라고 할까. 퇴직하고 어려운 삶을 사는 친구가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요새는 항암 치료를 받으러 경기도 광주시 집에서 나와 한참 걸어 수서동 암센터까지 버스를 타고 다닌단다. 법인 대리 회사에 부탁해 한 달에 두 번, 운전사와 작은 승용차를 그 친구 집에 보냈다. 그 친구는 누가 보낸 것인 줄 안다. 5년이 지났지만 그 두 친구는 지금도 누가 누구에게 차를 보내줬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정이 더 두터워진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양반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다. 물론 그 이름을 남기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후손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 때문에 우리 조상은 얼마나 많이 싸웠는가. 명성과 공적이 자기 것이라고 서로 주장하면서 우리는 서로 미워하게 된다. 요즈음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정치판이 그렇다. 명성과 공적 싸움이다.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싸움이다. 우리와 중국은 같은 동양권이다. 같은 한자 문화 속에서 유교를 숭상했다. 중국인도 체면을 중시한다. 체면이 상하면 거래 관계도, 친구 관계도 끝장이 나는 나라가 중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멍을 사랑한다. 그 4무의 사상을 존경한다. 한국에도 4무의 사상을 가진 종교인, 소설가, 일반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알려지지 않을 뿐.
2014년 9월 29일
CEO 에세이
대기업에서 50대 중반이 되면 버텨야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업의 임원 역할이다. 그래서 버텨야 한다.
스스로 연봉을 낮추고 권한을 축소해서라도 버텨야 한다.
젊은 나이에 대기업에 입사해 50대 중반까지 임원으로 재직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퇴사하고 3년 동안 정보기술(IT) 분야의 새로운 사업을 구상, 시작하고 사람을 모으다가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이렇게 퇴직 후 3년을 지낸 한 후배의 얘기다.
“대기업의 임원으로 일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여러 부서의 업무를 조정하거나 사원들의 품의에 대한 결정을 내려 주는 것밖에 없었어요. 조직 속에서 일하는 방법만 알 뿐 스스로 조직을 만들 수도 없고 직접 영업을 할 수도 없고 저 혼자의 기술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큰 조직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소개 좀 부탁합니다.”
실감나는 얘기였다. 그가 비록 대기업의 마케팅 책임자로 신제품을 성공시키고 생산 과정을 개선해 비용을 줄이고 새로운 유통 조직을 만들어 매출을 올렸지만 그런 일을 혼자 한 것은 아니었다. 연구소·공장·영업조직·광고회사·마케팅 부서가 조직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 기업은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동안의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새로운 사업을 시도했지만 제품을 생산할 줄도 모르고 개인 특허가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광고물을 제작할 수도 없고 은행 대출을 받는 요령도 모른다는 것을 3년이 지난 후 깨달은 것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대기업의 임원이다.
대기업에서 50대 중반이 되면 버텨야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업의 임원 역할이다. 그래서 버텨야 한다. 스스로 연봉을 낮추고 권한을 축소해서라도 버텨야 한다.
그러나 50대 중반이 넘으면 자기 자리로 바퀴벌레처럼 다가오는 부장급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기업의 주인이나 대표이사 역시 혁신과 신기술의 도입을 외치면서 기존 임원의 퇴사를 압박한다. 임원은 계약직이다. 신문에 난 인사 공고를 보고 자신이 그만두게 됐다는 것을 안 임원도 있을 지경이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지만 퇴직 후의 준비는 해 둬야 한다. 50대 후반이 된 자기를, 그것도 대기업의 임원을 역임한 무거운 자신을 채용할 기업은 없을 것이다. 아니 단연코 없다. 퇴직 후에는 지금처럼 여러 부서의 전문가들이 자신을 도울 수 없다. 자기 혼자 무엇인가 해야 한다.
B2B 사업이 그래도 소비재 사업보다 1인 기업의 장사로 위험이 적다. 몇 군데의 거래처만 확보해 놓으면 가능한 사업이다. 임원 재직 시 우선 인맥을 강화해야 한다. 광고회사, 소매 유통, 소재 납품 업체와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들의 값을 후려치고 납품 기한을 앞당기라고 독촉하는 것은 위험한 행위다. B2B의 예상 판매처를 대기업에 근무할 때 친해 둬야 한다. B2B 사업 중 몇 가지의 품목을 정해 그 품목의 생산·유통·경쟁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그들 기업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둬야 한다. 또한 그 품목의 소재와 품질을 평가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이 정도의 준비만으로도 50대 후반부터 조금은 안정된 ‘자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대기업 임원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2014년 8월 11일
CEO 에세이
내가 다른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도 나를 믿는다. 이것은 어느 정도 그런 것 같다.
상대방의 행위에 입각해 믿을 사람과 못 믿을 놈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를 믿으면 그것이 행복인 것 같다.
지은 지 40년이 넘은 아파트에는 8~9층까지 가지를 뻗친 아름드리나무들이 많다. 봄에는 목련과 벚꽃이 만개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여름에는 그 그늘이 시원하다. 특히 여름밤, 나무들 사이 벤치에 누우면 상쾌한 기운과 함께 기분 좋은 졸음이 온다. 친구들과 저녁에 거나하게 취할 만큼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그 벤치에 가끔 누워 여름밤을 즐긴다. 그러다가 또 잠이 들었나 보다. 놀라서 손목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오늘도 아내에게서 한소리 듣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갖고 다니던 작은 손가방이 없다. 벤치 주위를 둘러보니 눈에 띄지 않는다. 술집에 놓고 왔나?
다음 날 아침 6시쯤 깨었다. 여름이어서 6시라고 해도 이미 햇살이 따가울 정도다. 아파트 복도에 나가 난간에 기대 “어제 손지갑을 어떻게 했을까? 너무 일러 그 친구에게 전화하기도 그렇고 어딘가 있겠지”하고 말았다. 그런데 건장하게 생긴 50대 남자가 엄청 즐거운 표정으로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의 손에 내 손가방이 들려 있다. 경비원인가? 유쾌한 목소리로 “204동 602호에 사시지요?” “아, 네.” 손가방을 건네준다. “아침에 산책하다 보니 벤치 밑에 떨어져 있더군요. 열어서 주민증을 보고 여기 사는 것 같아서”라고 한다. “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내가 어제 손가방을 베고 자다가 떨어뜨렸나 보다. 경비원이 아니네. 고맙다는 말밖에 못한 내가 좀 아쉬웠다. 악수라도 청할 걸….
자주 무엇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데 실은 지금까지 잃어버린 적이 거의 없다. 네팔의 높은 산에 갔다가 작은 바위 위에 카메라를 놓고 왔는데 모르는 산악인이 마을까지 가져다준 적도 있었다. 스스로 이렇게 위안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내가 다른 사람의 것을 취하고자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내 것을 가져가지 않는다.” 진짜 그럴까. 혹은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무엇을 자주 어디에 놓고 다니는 습관을 합리화하는 것인가.
내가 다른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도 나를 믿는다. 이것은 어느 정도 그런 것 같다. ‘믿음’이란 사실에 입각해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믿음은 스스로의 의지이지 않을까. 회사의 경리 담당 사원을 믿는다. 그냥 무조건 믿는다. 의심해 봤자 나만 괴로우니까 믿는 것이 편하다. 그러면 그 사원도 나를 믿는다. 부부 관계도 그렇다. 배우자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내가 믿으면 그만이다. 따질 것이 없다. 상대방의 행위에 입각해 믿을 사람과 못 믿을 놈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를 믿으면 그것이 행복인 것 같다. 사람을 믿는 것일 뿐이다. 그가 하는 일을 믿는 것과 그 사람을 믿는 것은 다른 것이다. 임원이 하는 일은 사전에 조언도 해 주고 일을 끝냈다고 하면 그것을 직접 봐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을 못 믿어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에 사전에 주의도 주고 사후에 확인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내 것을 가져가지 않는다.” 진짜일까. 괜한 자기 합리화일까. 믿음이 그렇다면,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도 같은 게 아닐까. 잃어버리고서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믿으면 되는 것일까. 바보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2014년 7월 7일
CEO 에세이
국내 최대 전자회사의 주식 값은 일 년에 한두 번 130만 원 수준으로 내려가고 또 한두 번은 140만 원대로 올라간다. 지난 3년 동안 그러하였다. 130만 원에 사서 140만 원대에 팔면 7~9%의 차익이 생긴다. 이 차이는 너무 적은 것일까? 주식 차익의 목표를 10%보다 높게 잡는 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욕심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 회사의 주식 값은 그 회사의 실적과 별 상관없이 움직인다. 분기 실적이 아주 좋다고 발표됐을 때도 주식 값은 내려가는 경우가 있었고, 경영상 큰 어려움이 보도될 때에도 주식 값은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대기업이니까 그 정도의 사건은 무시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오르고 어떤 경우에 내려가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1년에 130만 원 밑으로 한두 번 내려가고 140만 원대로 한두 번 오른 것은 사실이다. 하여튼 140만 원만 넘으면 판다. 더 이상 올라가도 후회하지 않는다. 130만 원이면 산다. 내일 128만 원으로 떨어져도 속상해하지 않는다. 이렇게만 하면 거의 위험은 없는 것 같다.
이 회사의 주식 단가가 높아서 일반 직장인은 사기 어렵다고 하지만 1주만 사도 된다. 차익의 비율은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목표를 9% 차익으로 했으면, 8% 차익에서 파는 것이다. 그다음, 오르고 내리고는 아예 관심을 안 갖는 것이 좋다.
백화점에서 오랜만에 옷을 한 벌 샀다. 돈을 모아서 45만 원짜리 상의를 샀는데, 다른 가게에 똑같은 옷이 있다. 들어가서 “이 옷 얼마예요?” 하고 묻는다. “36만 원인데요” 그러면 화가 난다. 바가지를 썼구나. ‘다음에 백화점에서 사지 않고 이 가게에서 사야지’ 하고 다짐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가격은 옷을 사기 전에 몇 군데를 비교해야지, 사고 나서 비교하는 것은 기분만 잡친다. 더 싸게 샀으면 ‘혹시 가짜?’ 하고 의심과 걱정을 하게 되고, 더 비싸게 샀으면 화가 날 뿐이다.
서울 잠원동 어느 시장처럼 생긴 대형 할인점 안 가게에서 어리굴젓을 샀다. 사고 나서 60이 넘어 보이는 주인에게 “이거 국산 자연산 굴 맞지요?” 하고 물으니 세상을 오래 살아서 주름이 그득한 그 할머니는 “샀으면 가서 맛있게 드세요”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 표정에는 거짓도 없고 귀찮음도 없어 보였다. 중국산을 국산이라고 속여서 팔았기 때문이 아닌 것 같다. 본인도 이것이 자연산인지 양식인지 몰라서 손사래를 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젊은이, 샀으면 그만이지, 확인해서 뭐하나? 인생을 그렇게 살면 피곤한 거야.’ 할머니의 얼굴 주름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손해 볼 때도 있고, 별로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무엇인가 좋은 일이 생기는 때가 있다. A라는 기업을 상대로 열심히 영업을 했는데, 그 회사와의 거래는 성립되지 않고, 제안도 하지 않은 B기업과 꽤 큰 용역을 계약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내가 지금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절대적인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 좋은 일이 한 가지 생기면 조심하는 것이 좋다.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삶은 필연의 무작위성(random)을 갖는다.
손해와 이익, 그 자체가 물론 중요하지만 삶을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손익 자체가 아니라, 그 손익을 인식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 굴이 상하지만 않았으면 산 다음에 국산인지 중국산이지 아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옷을 사고 같은 옷의 가격을 다른 점포에 물어보러 다녀서 좋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주식을 샀으면 주식 값이 오를 때만 기다리면 되지, 그 주식 값이 더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짜증을 내봤자 무엇이 좋을 것인가? 사실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삶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는 방법과 태도다. 그래서 사실보다 인식이 더 중요한 것 같다.
2014년 6월
CEO 에세이
자기가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먼저 이뤄져야 자유와 평등이 상당한 수준으로 양립하는 복지국가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사과가 한 알밖에 없다. 이것을 나누어 줄 자녀는 세 명이다. 아버지 (가)는 사과를 균등하게 세 개로 잘라 한 쪽씩 나누어 준다. 아버지 (나)는 세 자식을 불러 사과 한 알을 주면서 너희들이 알아서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라고 한다. 당신은 어떤 쪽의 아버지와 더 가까운가?
세 등분해 주는 아버지의 생각을 ‘인간 비관론적’, 그냥 한 알을 주면서 그들이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리라고 믿는 생각을 ‘인간 낙관론적’ 관점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맹자와 노자의 차이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하니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대립됐던 인간관인 것 같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의 현재 정치·사회적 리더십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는 고려해 볼만하다.
우리 민족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평등’을 더 자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평등하지 않으면 나쁜 것으로 보는 시각이 퍼져 있다. 반면 ‘자유’는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비록 ‘자유’와 ‘방종’을 구별한다고 하더라도 ‘자유’라는 말은 보수적이고 기득권 옹호 세력의 단어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승만 대통령 통치 시절의 ‘자유당’이 연상돼서 그런 것일까? 그러나 자유는 책임을 전제로 한 사고이고 주장이다. 자유라는 한자는 스스로 시작하고 스스로 끝맺는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자유의 영어 단어를 물으면 거의 모두 ‘프리덤(freedom)’이라고 한다. ‘그러면 해방이란 뜻의 영어 단어는?’이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대답이 없다. 자유와 해방은 다른 뜻이다. 해방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식민 통치로부터의 해방, 독재 정권으로부터의 해방 등 부당한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반면 자유는 ‘벗어남’ 만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진다는 뜻을 포함한다.
아버지 (가)는 평등을 더 중시하고 아버지 (나)는 자유를 더 중시하는 인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혹자는 자신에게는 ‘자유’를 중시하고 타인에게는 ‘평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나는 내 책임 하에 내 뜻대로 해도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내 뜻대로 내가 정의롭게 분배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은 대체로 독재를 낳는다. 독재자가 백성을 꼭 못 살게 구는 것만은 아니다. 경제개발, 부패 척결, 부국강병 등 통치자의 임무를 독재자가 더 잘 수행한 역사는 많다. 그러나 독재자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나는 잘 살고 싶지도 않고 더 편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내 뜻대로 하고 싶다”고 저항하면 독재자는 그런 사람을 ‘반역’으로 몰아세운다.
평등과 자유는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국가가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자유를 인정하되 법에 의해 어느 정도의 경제·사회적 평등 또한 보장하는 것이 ‘복지국가’의 기본일 것이다. 그러나 복지국가에서도 자기가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먼저 이뤄져야 자유와 평등이 상당한 수준으로 양립하는 복지국가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5월 26일
CEO 에세이
5월 5일 어린이날, 100명의 학생은 모두 큰 사고 없이 오대산 청소년수련원으로 내려왔다. 선발이 되든 안 되든 2박 3일의 산행은 그들에게 자신감을 키워 줬고 좋은 친구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신을 만나게 해 줬다.
세월이 그렇다. 그냥 ‘선박 사고’라고 말한다. 구조를 기대했었던 때에는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넷을 쉬지 않고 보았었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도 않다. 친구들이 모이면 “그 얘기는 그만 하자”고 한다. 학생들의 부모와 일반인 유가족을 도울 수 있는 때가 곧 올 것이다. 그때 돕는 일밖에 지금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날씨도 그렇다. 5월 3~5일, 대관령에 눈이 오고 오대산에는 매서운 비바람이 몰아쳤다. 대한산악연맹 한국청소년오지탐사대원의 마지막 선발을 위한 2박 3일의 시험(테스트) 산행이었다. 몹시 추웠다. 오지탐사대의 책임자로서 “사고라도 나면…”하는 걱정을 하다가 머리를 저으며 생각을 지웠다. 20명의 학생들이 한 조다. 모두 5개조 100명. 대학생이 80명, 고교생이 20명. 100명 중 여학생이 30명이다. 이들은 수만 명의 관심 속에서 서류 전형에 합격하고 다시 체력 테스트와 면접을 통과한 100명이다. 이번 산행을 통해 그들 중 반은 최종 선발되고 반은 떨어진다. 오지탐사대의 정원은 50명뿐이기 때문이다. 각 조의 선두는 학생이다. 그들은 스스로 임무를 나눴다.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 운행, 식량 준비와 취사·장비·기록·촬영·의료 등의 역할 분담이다. 산을 처음 와 보는 학생들이 100명 중 70명이 넘는다. 그들 옆에는 대한산악연맹의 기라성 같은 전문 산악인 20명이 따라간다. 그러나 리더 역할을 하지 못한다. 지도가 아니라 평가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도와주지 못한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돕지 못한다. 학생들을 뒤나 옆에서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선두와 후미가 떨어지지 않도록 은근히 독려하고 사고가 날 것 같은 장소에는 미리 가서 대비한다.
사고가 날 것 같아도 조금 더 참는다. 눈빛으로 경고를 줄 뿐이다. 그래야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오대산 능선의 차가운 비를 맞으며 야간 운행을 그치고 천막을 쳤다. 전문 산악인이 추워서 떠는 한 학생의 팔에 슬며시 손을 대 보았다. 소름이 끼쳐있는 차가운 팔이었다. 그 학생은 버너에 불을 붙이고 손을 쬐다가 결국 손등에 화상을 입었다. 바로 그 순간 그 산악인은 차가운 물티슈로 학생 손등의 온도를 내리고 소독약을 바른다. 그리고 같이 내려가자고 한다. 학생은 내려가지 않겠다고 한다. 내려가면 탈락이기 때문이다. 붕대를 감아주고 화상의 후유증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그 학생의 행동을 주시한다.
5월 5일 어린이날, 100명의 학생은 모두 큰 사고 없이 오대산 청소년수련원으로 내려왔다. 그들의 말이다. “저는 여기 오기 전에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남을 위해 무엇인가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이렇게 강한 줄 몰랐습니다. 이제 저는 저의 가능성을 다시 찾았습니다.” “저는 모범생입니다.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았습니다. 이제 저는 저보다 잘난 사람들이, 아니 저와 같이 잘난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대견하다. 선발이 되든 안 되든 2박 3일의 산행은 그들에게 자신감을 키워 줬고 좋은 친구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신을 만나게 해 줬다. 그들의 몫이다. 그들의 자산이고 추억이다. 대한산악연맹의 것이 아니다. 연맹은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 젊은 산악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기를 기대할 뿐이다.
2014년 5월 12일
CEO 에세이
우리나라 헌법에 ‘남녀가 결혼하면 10년마다 이혼해야 하며, 이혼 후 1년 이내에는 (기존 부부를 포함해) 재혼할 수 없다’는 조항을 넣으면 어떨까? 여자와 남자 중 누가 더 좋아할까? 아마 처음 10년은 서로 사랑하니까 이런 강제 조항에 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50이 넘어 60을 바라보면, 남편의 아내에 대한 배려가 커질 것이다. 남자가 아내 없이 살 수 없는 나이가 되면 아내의 소중함을 새삼스럽게 느낄 것이다. 50이 넘은 아내는 자식만 있으면 되고 남편의 불필요성을 깨달아 10년 주기가 올 때를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형법에 ‘만 20세가 넘은 자녀에게 학비와 주거비 이외의 용돈을 주는 부부에게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조항은 어떨까? 잘 살든 못 살든 성인 자녀에게 용돈 지급죄를 만들면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주고 싶어도 못 준다. 신나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 오랫동안 보호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살다 보면 이런 상상을 할 때도 있다.
남자 중학생 7명을 모아서 신상품 아이디어를 찾는 좌담회를 가졌다. 상품 이야기 전에 그들의 욕구를 이해하고자 “아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야?” 하고 물었다. 한 학생이 주저주저하면서 “아빠와 이야기 좀 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한다.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와 이야기하면 어때?”라고 되물었더니 “엄마는 말이 안 통해요. 무조건 야단부터 쳐요. 명령만 해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럼 엄마가 싫어?” “아니요, 엄마는 엄마잖아요! 싫지는 않아요.” “그럼 아빠는?” “아빠는 싫어요. 저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진지한 대화였다. 아빠가 나를 한 인격체로 대하고, 나의 문제와 미래에 대해 아빠와 가슴 속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빠와 이렇게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낳았으니까 그냥 엄마다. 엄마는 엄마로서 충분하고 아빠는 나를 인격체로 대해야 좋은 아버지란다.
부부는 사랑해서 결혼한다. 그런가? 정말 나는 나의 배우자를 사랑해서 결혼했는가? 결혼 후 5년 정도 지나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아마도 50% 이상이 “글쎄”라고 자답할 것 같다. 영국의 사회사상가인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남자는 섹스를 원하고, 여자는 사랑을 원한다고? 천만에 말씀이다. 섹스는 둘 다 원하는 것이고, 사랑은 남자가 더 원한다”고 단정했다. 남자로서 살다 보면 기든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아마 ‘내가 상대방이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마음과 행동’인 것 같다. 남편이 아내로부터 월급날마다 “여보,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소중하게 쓸게요”라고 말하는 아내를 원한다면, 아내가 그런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내가 부자는 아니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남자를 원한다면, 남편은 적은 봉급이지만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자기 업무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내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일부일처제가 보편적 가족제도가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살다 보니 다른 부부제도보다 일부일처제가 그래도 가장 문제가 적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제도가 보편화됐으리라. 일부일처제는 자식과 경제를 공유하는 특이한 인간관계다. 어떤 남남의 관계도 이러하지 않다.
어린 자식이라도 한 인격체로서 존중하며 진지한 대화를 하는 아버지가 있는 가정, 남편이 원하는 여자가 되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아내가 있는 가정, 아내가 원하는 남자가 되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남편이 있는 가정. 이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인 것 같다.
2014년 5월
CEO 에세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 발표는 유권자에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려주고 여러 관점에서 지지 후보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6·4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언론은 여론조사를 연일 보도하고 있다. 현재의 판세라고 한다. A후보 43.6%, B후보 41.4%, 모름 15.0% 등이 보도의 내용이다. 언론에 보도되는 여론조사를 해석할 때 세 가지를 고려하면 판세를 좀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첫째, 표본 오차다. ‘오차 범위 내의 박빙’이란 기사 제목도 눈에 띈다. 전체 유권자 모두를 조사했을 때와 몇 백 명 혹은 몇 천 명의 표본 응답자만 조사했을 때의 차이가 표본 오차다. 표본 오차는 응답자의 수에 따라 다른데, 언론 보도의 표본 오차는 이 점을 계산한 결과다. 표본 오차는 응답자를 추출한 방식에 따라서도 다르다. 모든 유권자에게 일련번호를 매겨 놓고 그중에서 1000명마다 1명씩 응답자를 고르거나 난수표를 이용해 표본을 추출하는 것을 무작위 추출(random sampling)이라고 한다. 표본 오차의 계산은 이러한 무작위 추출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일련번호는 없다. 또한 추출된 유권자 중 전화를 받지 않거나 응답을 거절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표본 오차 계산 방식은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 모든 전화 면접 표본조사에서는 추출된 전화번호 중 30% 미만의 사람만 응답한다.
자동응답시스템(ARS)으로 조사하면 그 응답률은 훨씬 더 떨어진다. ARS는 조사비용과 시간이 적게 드는 장점이 있지만 대표성 있는 표본을 추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조사 방법이다. 이에 따라 무작위 추출을 전제로 한 표본 오차 계산 방식을 전화 표본조사나 ARS 조사 방법에 적용하는 것은 통계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또한 표본 오차는 소위 신뢰 구간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보통 95%의 신뢰 구간을 적용하지만 신뢰 구간은 통계를 이용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다. 표본조사에서 표본 오차를 제시하는 것은 유권자들에게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보면 타당한 오차 계산 방법은 아니다.
둘째, 투표율을 고려한 판세 분석이다. 선거 종류에 따라 투표율은 40% 내지 70%대다. 언론에서 전체 표본 중 A후보 41%, B후보 39%, 모름 20%로 백중이지만 ‘적극 투표층’ 중에는 A후보 42%, B후보 50%, 미정 8%로 B후보가 우세하다고 보도한다. 적극 투표층은 대개 “나는 이번 선거에 꼭 투표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을 지칭한다. 적극 투표층의 응답이 실제 투표 결과와 좀 더 유사한 현재의 판세일 것이다.
셋째, 설문 방법에 따라 여론조사 결과가 다를 수 있다. 지지율은 “누구에게 투표하겠는가?”를 묻는 것이고 선호율은 “어떤 후보가 더 마음에 드는가?”를 묻는 것이다. 지지율과 호감률은 구별돼야 한다. 후보자의 이름을 불러주는 순서도 응답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후보자가 5명 이상일 때 첫째와 마지막으로 불러준 후보자에 대한 지지율과 호감률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이에 따라 응답자마다 후보자 이름의 순서를 바꿔 질문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 발표는 유권자에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려주고 여러 관점에서 지지 후보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표본 오차의 해석 방법, 적극 투표층의 응답, 설문 문항도 같이 알려주면 현재 판세에 대한 유권자의 이해를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4월 21일
CEO 에세이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를 등정한 한국인이 4명이다. 1986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14좌 모두를 처음 완등한 후 다른 어떤 나라에도 14좌 완등 산악인은 아직 3명을 넘지 못한다. 대한산악연맹의 회장은 아시아산악연맹을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이스클라이밍과 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 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올해에도 10개 이상의 전문 산악 팀들이 세계의 고봉과 거벽 등반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악 강국이다.
그뿐만 아니다. 20세 이상의 한국인 중 매주 산에 가는 사람이 12%, 한 달에 한두 번 산에 가는 사람은 39%, 합하면 51%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산에 가고 있다(2013년 한국리서치-이마운틴 조사 자료). 인구수로 1900만 명이 한 달에 한 번 이상 산에 간다. 한국은 세계 최다 등산인 보유국이다. 하긴, 도봉산 입구의 주말 등산 인구수가 ‘기네스북’에 올랐다. 하나의 산을 향한 최다 산행 인구 기록이다. 전문 산악인만이 아니라 일반 등산객 수에서도 한국은 세계적인 산악 강국이다.
등산은 왜 할까?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니 산에 가는 사람들 중 82%가 건강을 위해 산에 간다고 한다. 46%는 경치나 분위기가 좋아서 가기도 한다. 43%는 산을 걷는 것 자체가 좋아서 간다. 정상에 오르는 기분이 좋아서 간다는 사람은 29%다. 한 사람이 산에 가는 이유가 여러 가지이고 그 이유를 모두 대답한 조사 결과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가는 사람들보다 산을 걷는 것 자체가 좋아서 간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등정의 쾌감보다 산을 걷는 그 느낌이 더 좋다는 것이다.
7000m 이상의 고산과 1000m가 넘는 거벽을 등반할 때, 전문 산악인들은 이런 다짐을 한다. ‘피곤하기 전에 쉬고, 목마르기 전에 마시고, 허기를 느끼기 전에 먹어라! 너의 힘 70%만을 사용하라! 천천히, 모든 것을 천천히 하라!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하라! 웃어라! 쥐어짜지 마라!’ 20일 이상, 5000m 이상의 고산에서 등반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억지로 참아서는 안 된다. 몸에 맡겨야 한다. 조금이라도 서두르거나 급하게 행동하면 가슴과 머리에 고통이 오고, 결국 산행을 포기해야 하는 무서운 고산병에 시달리고 만다. 자연에 순응하는 자만이 본인이 오르고자 하는 곳에 오를 수 있다. 억지로 참아서 될 일이 아니다. 하루 이틀은 참으면서 오를 수 있겠지만, 사람의 몸은 그의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열흘씩 참아주지는 않는다. 의지로 될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이 자연의 일부인 내 몸에 우선 순응해야 한다. 그리고 더 큰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고산을 등정할 수 있다.
근교 산행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시작해야 오래 걸을 수 있다. 산길에 돌출된 돌을 피하고, 숲의 냄새와 계곡의 기운을 맡으며, 능선의 바람과 풍광을 몸으로 맞으면서 나를 내 몸에 맡겨야 산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누구에게도 산은 도전의 대상이 아니다. 산이 당신을 공격한 적이 있는가? 산의 폭풍과 추위는 그냥 자연일 뿐이다. 추위나 바람은 당신을 의도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자연은 도전이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산행의 순수성을 핵심으로 하는 알피니즘은 전문 산악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말 등산객에도 있다. 알피니즘은 전통적으로 도전과 모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공통점이다. 그러나 그 도전과 모험의 대상이 산, 짐승, 식물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이 도전의 대상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나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명예욕, 보람 추구 욕망이 극복의 대상인 것이다. 한 인간의 내부에서도 육체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 쓸데없는 의지와 욕망이 극복의 대상일 것이다.
자신의 육체와 의지를 조화시키고 외부의 자연에 순응함이 ‘산을 걷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함’인 것 같다.
2014년 4월
CEO 에세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최선을 다한 패자를 칭찬하고 위로하면 어떨까.
개막식에서 실수가 아닌 실수를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실수한 그 사람을 모두가 격려하는 장면을 연출하면 어떨까. 금은동의 메달 색깔을 같게 하면 어떨까.
대한민국은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금 3, 은 3, 동 2 등 8개의 메달을 땄다. 금메달 개수로는 13위, 동계 스포츠 환경이 좋은 유럽과 북미 그리고 인구 대국인 중국 다음 순위다. 일본보다 많다. 전체 메달 개수로 봐도 14위다. 김연아 선수는 은메달을 받고도 의연했다. 그녀가 라커룸에서 울었던 이유는 금메달을 따지 못해 억울해서가 아니라 “이제 해방이다. 할 일을 잘 마쳤다”는 자기 위로와 자기 사랑의 울음이었으리라. 심판 판정을 두고 한때 언론과 인터넷에서 거센 비판이 있었지만 국민들은 “괜찮아”를 연발했다. “잘했다”, “수고했다” “고맙다”는 국민의 마음을 언론들도 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국민이 있는 나라다. 성숙한 시민이 있는 사회다.
한국은 이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준비해야 한다. 조직위원들은 소치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소치로 갔다. 장애인 동계올림픽을 보고 느끼고 배우기 위해서다. 소치 올림픽 개막식에서 오륜기의 우상단 원이 펼쳐지지 않은 것을 보고 ‘고소함’을 느끼고 “러시아가 그렇지 뭐”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많았을 것이다. 평소 러시아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실수는 있다. 올림픽에는 실수만이 아니라 패자도 억울함도 있다. 4년 동안 각고의 노력이 한 번의 실수로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사례가 무수히 많다. 우리는 그들의 눈물에 동감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최선을 다한 패자를 칭찬하고 위로하면 어떨까. 개막식에서 실수가 아닌 실수를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실수한 그 사람을 모두가 격려하는 장면을 연출하면 어떨까. 금은동의 메달 색깔을 같게 하면 어떨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정에 벗어나면 시상식에서 금메달 국가는 연주하되 게양되는 국기의 위치는 모두 같게 하면 어떨까. 이것도 규정에 벗어나 안 된다면 대한민국이 금메달을 받았을 때에만 그렇게 다른 두 국기의 높이를 태극기와 같은 위치로 올리면 어떨까. 아예 IOC 위원들에게 평창 동계올림픽부터 국기 게양의 규정을 바꾸자고 제안하면 좋을 것 같다.
‘올림픽 정신’은 참여에 있다고 초등학교 때 배웠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처음 출전하는 나라의 선수들에게 개막식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일어나 고마움을 표시하면 어떨까. 한 국가에서 1~2명만 참여한 선수가 입장할 때 ‘붉은악마’가 환영 퍼레이드를 하면 어떨까. “평창은 1등을 추앙하는 올림픽이 아니었다. 패자를 위로하는 마당이었다. 한국인의 정서다. 그들은 늘 그렇게 살았다”는 세계인의 인식을 기대하고 싶다. “괜찮아”, “고맙다”, “수고했다”, “다음에 잘하면 돼”라는 연호가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파를 타고 알려지고 평창 이후에 모든 국가의 경기에서 “괜찮아”를 연호하는 관중이 늘어나면 이것이 평창 올림픽의 성과가 아닐까.
한국은 평창 올림픽에 많은 돈을 사용할 수 없다. 가리왕산 1560m 정상에 신설되는 스키 활강장은 올림픽 이후 흉악스러운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초라함과 수치스러움을 “괜찮아”로 극복하면 어떨까. 한국 조직위원회가 IOC를 설득해 평창 동계올림픽을 20세기 최초의 패자를 위한 올림픽으로 만들기를 소원한다.
2014년 3월 10일
CEO 에세이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여파는 계속 확장되고, 그에 관한 각계의 정보는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 수산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수입 금지 조처가 시행되고 있지만 서울 시내 횟집의 손님 수는 지금도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한우 고기 음식점 주인도 울상이다. 생선 대신 고기를 찾아서 손님은 많이 온다. 매출도 증가한다. 한우 고기에 대한 수요가 커지지만 원산지와 유통에서는 공급을 늘리지 못해서 고기 값이 올랐다. 식당에서 음식 값을 올리면, 금방 손님이 떨어지기 때문에 고객이 많이 와도 값을 올리지 못한다. 옆에 있는 고깃집보다 150g에 몇천 원만 비싸도 손님이 안 오기 때문이다. 1년을 버티기 어렵다는 걱정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서울 횟집만 아니라 한우 고깃집까지 위협하고 있다. 부자들을 제외하고 이제 중층은 물론 중상층도 비싸면 안 먹고 안 산다. 같은 품질이면 조금이라도 싼 곳을 찾는다. 주부들은 가공식품도 제조업체 홈페이지를 이용해 대형 할인점보다 더 싼 가격에 사고 있다.
물가인상률 2.5%대, 경제성장률 3.0% 미만, 2013년도 월별 전년 동기 대비 백화점 매출 신장률은 평균 1.3%다(산업자원부 주요 유통업체 매출액 통계). ‘대박’의 시대는 지나갔다. 투자도 보수, 소비도 보수화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소비의 보수화 시대에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목표를 낮추는 것이 기본이다. 주식 투자에서 20~30%의 차익을 노리는 사람들은 멍청이 소리를 듣는다. 많아야 9%, 7%의 차익을 목표로 함이 최선이다. 그 선에서 끝내야 한다. 기업도 매출의 신장보다 비용의 감소를 우선 정책으로 삼아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다. 일부에서는 지속적 성장을 주장하지만 위험한 발상이다. 성장보다 우리 경제에서 낭비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 비용을 감소시키면 미래 성장의 싹을 자르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비용의 감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낭비가 더 크다. 낭비는 조직 관리 속에 있다. 올바른 인사관리가 낭비를 예방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기업의 궁극적 목적은 고용이다. 그래야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 기업이 현재 고용 상황을 유지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그러면 주인도, 경영자도 피고용자도 모두 길바닥으로 가족을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다. 경영자와 노동조합이 합심해 고용 조건 향상보다 고용 유지를 목표로 정할 때 고용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맞을 수 있다. 고용 유지를 위해서는 인건비, 즉 시간의 낭비를 없애야 한다. 100명의 사원으로 90의 생산성이 있었다면 이제 100명의 사원으로 120의 생산성을 이루어야 한다. 생산성 향상, 효율성 증대를 위해 중견 기업일수록 기업의 목표, 각 부서의 목표, 개인의 목표를 측정 가능하도록 설정해야 하며, 해당 사원들이 받는 상과 벌을 사전에 정해야 한다.
사원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들과 목표를 공유하고, 같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인사정책의 시발점이다. 시간이 걸려도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일방적 결정과 합의의 도출 사이에는 길어야 2~3개월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경영층의 독단적 지침은 인적 낭비를 더 많이 초래할 뿐이다. 태스크포스(TF) 팀을 구성해 구체적인 주제를 제공하고, 난상토론을 유도한 후 관련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TF의 팀장이 발표하면 공감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과정을 6개월 동안 두세 번 거치면 어느덧 사원들끼리 합의점을 찾는다. 이것이 경영자의 역할이다.
투자와 소비의 보수화 시대에서 성장 지향 정책은 회사의 기반을 붕괴시킬 수 있다. 고용의 감소는 우리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다. 사람 관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낭비를 예방하는 것, 이것이 저성장 시대의 기업 생존 전략일 것이다.
2014년 2월 18일
CEO 에세이
과거의 실수와 판단 착오가 반성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경우는 없다.
다시 목표를 정하고 여러 사람과 힘을 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 때 비로소 과거의 잘못이 사라지고 새로운 오늘이 내게 온다.
압구정동 성당 신부님 말씀이다. “여러분은 누구에게서 위로를 받아요?” “하나님이요.” 신부는 웃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세요. 내 가슴을 만지면서 자신을 위로하세요. 칭찬도 그래요. 하나님에게서 칭찬 받기 전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자기 자신을 칭찬하세요.”
새해가 시작됐다. 위로는 반성에서 시작된다. 2013년의 반성은 작년 말까지뿐이다. 반성은 잠깐 하면 된다. 고등학생 때 교무실에 꿇어앉아 매일 반성문을 썼다. 3일 동안 반성문을 썼더니 더 쓸 것이 없었다. 이외수 작가는 “잘못한 자를 비웃지 마라. 그는 지금 반성하고 있다”고 편을 들어 준다. 그렇다. 나는 이미 반성했다. 사람들이 나를 비웃어도 좋지만 나는 이제 나를 비웃지 않는다. 나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다. 나는 다시 할 것이다. 여러분들과 함께. 그럼 되었지, 어떻게 똑같은 반성을 매일 하라는 것인가. “이제 반성할 것이 없는 데요.” 선생님은 “아직도 반성을 하지 못하였구나. 1주일 더 정학 처분이 내려질 줄 알아.” “우라질, 반성 다 했다니까요.”
과거의 실수와 판단 착오가 반성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경우는 없다. 다시 목표를 정하고 여러 사람과 힘을 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 때 비로소 과거의 잘못이 사라지고 새로운 오늘이 내게 온다. 반성만 하고 있는 것은 꿈만 꾸고 있는 것과 같다. 꿈만 꾸고 싶으면 자야 한다. 잠 속에서 꿈꾸고 깨어서 또 졸면 그것이야말로 반성할 삶이다.
그 신부는 “자기 전에 잘될 거야, 잘될 거야, 잘될 거야”를 세 번 스스로에게 외치라고 조언한다. 길을 걸으면서도 “잘될 거야”. 정말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해낼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미국에 있는 50대 초반의 산악 후배가 편지를 보냈다. 달러도 없고 직장도 잃었다. 이제 비자 기간도 끝나간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아내는 곧 비워 주어야 할 방구석에서 울고 있다. 이것이 최악인가. “이것이 최악이라면 좋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것이니.” 그러나 그것은 말장난이다. 남에게서 위로를 받아 보았자 기분만 더 잡친다. 좌절할 시간이 그에게는 없다. “잘될 거야”를 허파 속으로 구겨 넣으면서 일자리를 찾아 뛰는 그 후배의 모습에서 8000m의 얼음과 바위를 오르던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난다.
우리는 외쳤다. 사라지면 안 된다. 슬쩍 꺼지면 안 된다. 안 보이면 안 된다. 활화산이 되자. 타다가 없어지자. 해야 할 것을 하다가 타버리자. 그것이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다. 지상이든, 허공이든, 매달리든, 기어오르든, 사라지지는 말자. 기름진 육신을 남겨 놓으면 안 된다. 육신을 소진하는 게 생명의 의무다.
오늘(1월 2일) 아침, 270명의 사원에게 2014년도 사업 계획을 발표한 자료는 55장이다. 그중 2013년의 반성문은 두 장이었다. 모두 내 탓은 아니지만 결국 내 탓이었다. 탓하고 있으면 뭐하랴. 다시 시작하면 될 것인데. 다시 시작함 속에 허상을 지우고 말장난 없애고, 가슴속에서 외치는 소리 그대로(참됨),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착함),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면(아름다움) 되는 것이다. 나는 용감한 사람은 못 되지만 다시는 비겁한 짓을 하지 않겠다. 이보다 더한 반성이 무엇이 있겠는가.
2014년 1월 6일
CEO 에세이
한국 도시에 사는 1500명의 부부를 만나보았다. 30대에서 60대까지. 부부란 도대체 어떤 인간관계인가? 왜 어떤 부부는 늙어서도 서로 즐겁게 살고 어떤 부부는 할 수 없이 같이 사는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남편은 어떤 아내를 두고 있는가? 집에 있는 것도 싫고 집에 들어가기도 싫은 남편은 아내와 어떻게 살았기에 그런가?
결혼 후 3~5년이 지나면서 부부는 서로에 대한 만족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그리고 서서히 그 만족감은 계속 낮아진다. 이것은 평균이다. 어떤 부부는 평균보다 훨씬 더 서로 만족하면서 살고 어떤 부부는 평균보다도 이하다. 만족감이 떨어지는 이유는 열정이 식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감정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과 열정이란 감정은 행복한 부부 사이에도, 서로 미워하는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식는다. 사랑은 피곤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소유와 질투를 동반하는 열정적인 사랑은 에너지를 많이 쓰는 감정이어서 오래 계속될 수 없다. 조사 결과, 섹스의 빈도는 부부의 만족도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성감을 나누는 부부 중에서도 서로 불편하고 미워하는 부부도 많다. 남편의 소득이 부부 간의 만족도에 끼치는 영향도 크지 않다. 월 소득 250만 원 정도만 넘으면 괜찮다. 월 소득이 300만 원인 부부에게 월급 1000만 원은 그야말로 대박일 것이다. 그러나 월 1000만 원의 벌이가 있다고 해서 부부의 금실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부의 만족감을 높여주는가? 우선 서로 결혼하자고 했던 이유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로 무엇인가 반해서, 소위 눈에 뭐가 끼어서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이다. 뜨거운 욕정으로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 외모, 신체, 학력, 부모의 재산, 직업 등등 이것저것 따져보고 결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동정과 사랑을 착각해서 가여워서 결혼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있다. 마지막으로 오래 사귀어 열정은 좀 식었지만 친구처럼 편안해져서 혼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저것 따져서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 후 5년쯤 지나면 서로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게 된다. 열정과 사랑으로 결혼한 사람 중에는 반쯤은 행복한 부부 생활을, 반쯤은 또 다른 이성을 찾아 헤맨다. 친한 친구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결혼한 사람들이 비교적 오래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결혼 후 20년쯤 지났을 때 부부의 마음과 행동에 따라서 중·노년 부부 생활의 만족감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열정과 사랑은 모든 부부의 감정에서 식어 버린다. 그 비어지는 공간을 친밀감으로 채운 부부는 행복한 생활을 하고, 그 허한 공간을 또 다른 욕정과 자존심으로 채우고자 하는 사람은 끝내 행복한 부부가 되지 못한다.
친밀감이란 무엇일까? 친구 같은 부부다. 무엇이든 다 털어 놓는다. 다른 이성을 좋아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 그런 이야기도 상의한다. 서로 소유하지 않는다. 질투하지 않는다. 사랑은 노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요구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는 없다. 요구한다고 해서 섹스는 할 수 있지만 사랑은 못 한다. 그런데 친밀감은 노력으로 생길 수 있는 선한 마음이다. 하루에 두 번 포옹하는 부부는 오래 행복하다. 포옹은 섹스보다 더 사람과 사람을 친하게 만드는 행위다. 서로 눈을 쳐다보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때로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자주 하는 부부는 행복하다. 그것은 노력이다. 서로 손을 잡고 그 맞잡은 손에서 느끼는 두 사람만의 추억은 섹스보다 부부를 더 편하게 해준다.
부부여, 섹스를 못하겠으면 포옹하라. 포옹은 미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자주 포옹하면 욕정이 아니라 친밀감이 생긴다. 서로 대화하라.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그러면 집안이 행복해진다. 손을 잡아라. 집에서도 가끔, 외출할 때에도. 이 사람이 좋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2014년 1월 1일
CEO 에세이
서울 지하철 압구정역에 들어서면 양쪽 벽이 온통 성형외과 광고다. ‘걔가 성형한 데!’, ‘Pre & Post’, ‘구부러진 다리, 펴진 다리’, 눈, 코, 안면, 윤곽, 가슴, 지방 흡입, S라인, 양악…. 압구정역 사방 1km 이내에 성형외과만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지금도 계속 생기고 있다. 대로 주변만 아니라 이면도로까지 성형외과 간판이 즐비하다.
‘미인은 표정으로 만듭니다. 저는 선만 그어드릴 뿐입니다’라는 성형외과 광고 문구가 있으면 어떨까? 그런 광고를 내걸면 사람들이 안 갈까? “수술을 하면 곧장 미인이 돼야지, 내가 또 무슨 노력을 해야 해? 그럼 안 해!” 이럴까?
성형수술만 한다고 미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5년 만에 만난 50대의 미혼 여자 친구가 모습이 좀 달라져 있었다. 분명 무엇인가 했다. 턱도 얇아진 것 같고, 눈도 커진 것 같아 보인다. 예뻐 보이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하지 않다. 인상이 이상하다. 그전에 보이던 자신감 어린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예쁜 얼굴 윤곽은 타고나는 것이리라. 코도 그러하리라. 하지만 고운 눈과 입술은 세월의 노력이다. 매력은 달걀형의 얼굴 윤곽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의 표정과 인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신입사원에게 매일 거울을 15분 정도 보라고 한다. 거울 속의 나를 내가 좋아할 때까지 보라고 한다. 그 눈을 쳐다보라고 한다. 나이가 들면 그 눈을 보기가 두렵다. 잘못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양심인가 보다. 거울을 보면서 내가 나를 좋아하면 나의 표정이 좋아진다. 거울 속의 비뚤어진 자기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스스로 표정을 만든다. 반듯하게 웃는 모습, 밝은 눈망울을 만들고 기분 좋은 기억을 떠올린다. 즐거웠던, 웃겼던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러면 거울 속 자기 자신이 조금씩 더 좋아진다. 정 안 되면 “위스키”라고 30번을 말해본다. 입술 양쪽이 올라가면서 좋은 인상이 나타난다. 내가 거울 속의 나를 좋아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삶이 즐거울 수 있다. 이제 미인이 되기 시작한다.
표정과 인상이 좋으면 미인
대개 좀 보기 싫은 사람은 그 얼굴 윤곽이 괴상해서가 아니라 그 표정이 어둡고 찌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면 그 표정은 더욱 더 찌그러진다. 얼굴 양면의 대칭성이 약해지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서 보면 더욱 싫다. 그래서 더 미워진다. 그래도 참고, 거울 속의 나를 내가 좋아하게 될 때까지 보면서 표정을 바꾸고, 좋은 생각을 하고, 깨끗한 눈을 만들어 보고, 입술 끝을 올리는 연습을 하면 점차 좋은 인상을 갖게 된다. 이렇게 매일 15분, 6개월을 ‘스스로 미인 만들기’ 거울 보기를 해 보라. 사람들이 당신 인상이 참 좋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매력이다.
모든 장사는 사람들과의 인상에서 시작된다.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장사를 잘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것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신입사원들에게 하루에 15분 거울을 보고 ‘미인 만들기’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눈이 작아도, 코가 낮아도, 턱이 굵어도 표정과 인상이 좋으면 미인이다.
미인의 또 다른 조건은 피부다. 땀은 어떤 화장품보다 더 좋은 화장품이라고 한다.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은 피부를 건조하게 만들어서 오히려 피부를 더 나쁘게 한다. 운동하면서 흘리는 땀은 피부 속의 더러운 물질을 밖으로 빼내고 탄력을 좋게 한다.
하루 15분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기, 내가 좋아하게 될 때까지 그 표정을 만들기, 하루 15분 땀 흘리면서 운동하기. 이 두 가지만으로 모든 사람이 미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013년 12월 18일
CEO 에세이
소비자를 객관적 대상으로 이해하고 그 행동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올드 스쿨이라면 뉴 스쿨에서는 소비자를 나와 유사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나와 다름을 인정한다.
‘헬로 아이엠스콧긴스버그(Hello! Iamscottgins berg)’라는 홈페이지로 유명한 미국의 마케팅 전문가, 스콧 긴스버그(Scott Ginsberg)가 마케팅 학자 및 실무 책임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인가요?” 단어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을 표현한다.
그는 질문의 응답을 두 가지로 분류했는데, 한 가지는 마케팅의 ‘올드 스쿨(Old School)’이다. 그는 ‘뉴(NEW): 신상품’, ‘와이(WHY): 이유를 이해함’, ‘커스터머(CUSTOMER): 고객’, ‘프리(FREE): 공짜, 할인’, ‘리스닝(LISTENING): 소비자 소리 듣기’, ‘비코즈(BCECAUSE: 원인의 분석)’, 한 가지를 추가하면 ‘콘셉트(CONCEPT): 개념’을 마케팅의 올드 스쿨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단어’로 분류했다. 모두 마케팅의 핵심 사고다. 기업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2년 동안 신제품을 내지 않는 상황이다. 고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객은 왕’이라는 주장은 1950년대부터 있었다. 그 고객의 소리를 경청하고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마케팅의 시작이다. 대형 마트의 유통 싹쓸이는 소규모 소매점보다 싼값에서 시작됐고 지금도 싼값과 하나 더 주기 경쟁이 그들의 무기다. 콘셉트는 마케터에게 핵심 사항이다. ‘이 제품의 제품 개념은?’, ‘포지셔닝 개념은?’, ‘광고 개념은?’ 우리는 이런 논쟁으로 수십 년을 보냈다.
그런데 긴스버그는 왜 이런 사고들을 ‘올드 스쿨’이라고 했을까. 그가 ‘뉴 스쿨(New School)’이라고 분류한 단어들과 비교하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뉴 스쿨’의 단어들은 ‘리스펙트(RESPECT): 인정과 존중’, ‘오센티서티(AUTHENTICITY): 마음으로부터의 진정성’, ‘패션(PASSION): 열정’, ‘트러스트(TURST): 믿음’, ‘익스피리언스(EXPERIENCE): 몸으로 느낌’, ‘아로마(AROMA): 냄새’, ‘트루스(THRUTH): 진실’ 등이다. 올드 스쿨의 단어들과 무엇인가 확실히 다르다. 소비자를 객관적 대상으로 이해하고 그 행동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올드 스쿨이라면 뉴 스쿨에서는 소비자를 나와 유사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나와 다름을 인정한다. 마케팅 개념, 기법, 논리보다 뉴 스쿨에서는 마케터의 소비자를 향한 진정한 마음, 착한 마음을 더 중시한다. 열정은 모든 곳에서 강조되고 있지만 어떻게 열정을 갖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선배는 거의 없다. 열정은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확답할 수 있을 때 생긴다. 믿음과 진실은 마음이다.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내가 그를 믿고 안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소비자가 무엇을 해도 나는 그를 믿는다는 마음속의 의지에서 생긴다. 체험은 교감을 낳는다. 몸으로 느끼지 않고 머리로, 논리로 따지면 소비자들과의 친밀감이 생길 수 없다. 정이 오고 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긴스버그는 ‘냄새’를 마케팅 뉴 스쿨의 중요한 단어로 제시했다. 냄새가? 그렇다. 말·논리·주장·학설·글·표정은 열심히 노력하면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냄새는 노력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사람들의 미모는 운동과 화장품으로 만들 수 있지만 사람 몸에서 나는 성적인 체취는 상대방을 진정 사랑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뉴 스쿨의 단어들은 마음이다. 그 뉴 스쿨은 모두 한국이나 동양의 오래된 사상들이다.
2013년 11월 25일
CEO 에세이
지난 일요일, 105.7㎡ 아파트의 작은 마루에 아내가 뻐득뻐득하게 말린 빨간 고추를 잔뜩 쏟아놓았다. 아침 햇살이 찬란하게 들어와 그 고추의 붉은색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가을이 갑자기 성큼 다가온 기분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마당에 펼쳐 놓은 고추 생각이 난다.
“이걸로 김장할 꺼야?”, “네.”, “이렇게 많은데, 김장하고 남아?”, “좀 남지”, “그럼 김장하고 남은 고춧가루도 있겠네”, “그럼요!”, “맛있겠다.”
김장하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배추가 트럭에 실려 들어온다. 어머니, 작은 어머니, 이웃집 아주머니가 모여서 소금물에 배추를 절이고, 부엌 마루에 생굴, 갓, 명태, 온갖 젓갈과 채소를 무채와 함께 큰 고무대야 가득 고춧가루에 벌겋게 비벼 놓는다. 외할아버지와 겸상을 받으면, 김장 속을 넣은 노란 배춧잎이 밥상 위에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이맘때, 수업을 마치고 어둑해지는 저녁 시간 친구 집에 놀러 가는 중이었다. 서대문 충정로3가 미동국민학교 옆의 철길을 걷다가 후다닥 뒤로 돌아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김장하는 날이었다. 엄마는 그 맛있는 김장 속을 버무리고 있었다. 늦으면 큰일이다. 김장이 끝나면 그 맛있는 배춧속을 못 먹는다. 현관 문을 젖히고 보니, 아! 다행이다. 엄마와 아주머니가 아직도 그 벌건 김장 속을 배추에 버무리고 있다. 배추와 무채는 물론 생굴도 그냥 있다.
지금도 그 맛이 생각난다. 침이 돈다. 어렸을 때 맛있었던 음식들. 외할아버지 반주상에 놓인 콩나물국과 김치, 어란, 어리굴젓, 석쇠에 구운 명태알, 장산적, 청진동의 빈대떡과 조개탕, 난지도로 캠핑 가서 먹던 양파와 감자를 넣은 꽁치 통조림 찌개, 처갓댁 제삿날에 뜨끈뜨끈하게 삶아 놓은 돼지고기, 함경도 친구 집 할머니의 특별 요리이었던 명태 순대, 그리고 돌아가신 장모님이 셋째 사위를 위해 담아 주셨던 도수 높은 약주. ‘수호지’의 양산박 술꾼들이 “그 맛이 입에 달라붙는다”며 마셨던 그 술 같았다. 맛은 향수(추억)다. 그 음식을 먹던 그때의 기억. 사람들, 배고픔, 웃음, 넉넉함, 인자함…. 지금도 그런 것들이 그 맛 속에 같이 있는 것 같다.
이제 찾기 어려운 음식과 추억들이다. 집전화가 휴대전화로 바뀌고, 인터넷으로 무엇이든 찾아 볼 수 있고, 서로 교감하고 물건을 주문하는 시대다. 10년 이상 타고 다녀도 새 차 같기만 하며 휘발유 소비가 반도 안 되는 고급 승용차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남산 높이만한 150층 건물이 생기고 섬만큼 넓은 선박이 건조되고 있다. 수백만 명을 일시에 괴멸시키는 무기들이 바로 근처에 있다.
우리 주변의 이러한 물건들은 기술 혁신 제품들이다.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지 못하는 물품도 있다. 쌀도 인간이 재배하지만 인간의 창조물은 아니다. 채소도, 과일도, 비단도, 광목도, 양털도 그렇다. 목재 가구도 천연가죽 소파도 그렇다. 우리가 피부를 비벼대면서 먹고 입고 자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은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다. 기술혁명 시대에도 사람들은 그런 자연의 창조물을 먹고 입고 쓰기를 좋아한다. 값이 비싸도 유기농 축산물의 소비가 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원래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파괴하기 전에 있었던 본래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찾고 있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변하고 있는 것일까?
아내가 김장을 하는 날이 다시 오지 않을까? 도시의 찬란한 가로등을 인간은 잠시 꺼버릴 것이다. 밤하늘의 별도 빛날 것이다. 인간의 DNA 속에 유전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 자연의 추억을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기술 혁명과 함께 자연의 가치도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희망이 아니다. 인간이란 지구의 한 생명체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2013년 11월 18일
CEO 에세이
레이디 가가는 대중을 상대로 마케팅을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열광하는 극소수의 팬들만(1%) 그의 홈페이지로 초대하고 그들과 같이 거리에서 춤을 추고 인권 운동을 같이한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대중매체 광고는 그때 그 상품에 관심이 없으면 소비자가 기억하지 않는다. 대중매체 광고의 효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요즈음 대중매체 광고만으로는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
지난 9월 16~17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던 미국마케팅협회(AMA)의 연례 세미나 주제는 ‘스톱 마케팅. 스타트 인게이징(Stop Marketing. Start Engaging)’이었다. 내 상품에 관심도 없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논리적·이성적·개념적 마케팅은 이제 그만두자는 것이다.
그 대신 고객과 교감(engaging)을 시작하자는 제안이다. 레이디 가가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됐다. 레이디 가가는 그래미상 5개를 포함해 205개의 유명한 연예인 상을 받았으며 그녀의 비디오를 SNS에서 5억 명 이상이 봤고 현재 그의 팬 수는 1억5000만 명이 넘는다. 그런데 레이디 가가는 대중을 상대로 마케팅을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열광하는 극소수의 팬들만(1%) 그의 홈페이지로 초대하고 그들과 같이 거리에서 춤을 추고 인권 운동을 같이한다. 그녀는 그 1%의 열광팬들에게 몬스터(MONSTER)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그녀가 만든 검은색 향수를 전달하고 그녀의 심벌인 해골 탈을 상징물로 준다. 그 1%가 레이디 가가를 만든다. 그들은 28세밖에 되지 않은 레이디 가가를 엄마(MOTHER OF MONSTER)라고 부른다. 레이디 가가는 그 팬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자랑도, 자기 홍보도 하지 않는다. ‘더 착하게 더 용감하게’ 살자는 자신의 가치를 주장할 뿐이다. 동성 연애자, 장애인, 외로운 노인, 가난한 어린이를 위한 사회운동을 팬들과 같이한다. 그 열광하는 팬들이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레이디 가가를 알린다. 자랑한다. 그 가치를 전한다. 순전히 자발적으로 보수도 받지 않는 레이디 가가의 판촉 사원들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SNS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SNS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받는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가치를 전하는 그림·글·사진·상품·서비스다. 진(참됨, 감추지 않음), 선(착함, 나와 타인을 똑같이 좋아함), 미(아름다움, 인간의 손때가 없는 원래의 모습)가 아마 그 대표적인 가치일 것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자기 기업과 상품을 홍보하는 회사가 우리나라에도 2000개가 조금 넘는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거의 모두가 ‘일방적 자랑’이다. ‘광고’다. ‘교감’이 보이지 않는다. 소비자와 대화를 하지 않는다. 자기주장만 늘어놓을 뿐이다. 체험을 나누고 있지 않다.
‘귀사를 믿고 귀사의 상품을 마치 내 분신처럼 좋아하는 소수(수십 명으로 시작해도 충분합니다)의 소비자를 모으십시오. 그들이 스스로 SNS와 광장에서 모이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들에게 귀사의 가치를 전파하십시오. 작은 가치라도 귀사가 이것만은 우리가 해야겠다고 마음속에서 외치는 가치를 전달하십시오. 아무 것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귀사가 전파하고자 하는 가치가 진정한 것이면 귀사의 팬들은 꾸준히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늘어납니다.’
2013년 10월 28일
CEO 에세이
SAMSUNG, LG, HYUNDAI, KIA. 한국에서 태어난 세계적 브랜드다. 이들 상품은 10개국 이상에서 만들고 있고 전 세계 150개 이상의 국가에서 판매되고 있다. 세계 시장 점유율 1등을 하는 제품들도 있다. 그야말로 브랜드다운 브랜드다. 전 세계의 수십억 명의 소비자가 삼성전자의 휴대전화를 삼성이 만들었느니 좋을 것이라 믿고 산다. 현대자동차도, LG의 에어컨도 그러하다. 소비자들이 그 제품의 품질 혹은 가격을 보기보다 그 브랜드(brand)를 보고 상품을 선택한 것이 마치 현대의 새로운 소비 풍조인 것 같지만, 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수천 년 전, 물물교환의 시대에서부터 그러했을 것이다. 다만 ‘브랜드’라는 용어가 없었을 뿐이다.
불국사를 발원(發願)한 사람은 김대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약 1500년 전의 일이다. 김대성은 아마도 유명한 건축가였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경덕왕은 ‘김대성’이란 사람의 평판과 신용을 믿고 그가 원하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건축을 허락하고 지원했을 것이다. 요즈음 단어로 ‘김대성’은 사찰 건축 회사의 걸출한 브랜드였다.
개성상인들의 조합과 유사한 ‘송상(松商)’이 파는 상품을 그 당시의 백성들은 믿고 샀다. 이것은 “송상이 파는 것이니 그 품질은 보장된 것이다”라는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송상’이 매점매석 등 이윤 극대화를 위해 지나친 상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송상’은 믿을 수 있는 조직이었다. ‘송상’의 상품은 언제나 품질이 좋았기 때문에 ‘송상’ 사람들을 믿은 것이다. ‘송상’이란 단어를 믿은 것이 아니다.
‘고려인삼’ 역시 그러하다. 백제의 인삼이 일본으로 판매된 기록이 있다고 하니, 한반도의 인삼에 대한 믿음은 천년이 넘은 이야기다. ‘고려인삼’도 브랜드였다. 한반도에서 인삼을 재배한 우리 선조들이 6년, 7년씩 그 인삼을 정성을 다해 키워서 상하지 않게 말려 보관하고 유통시켰던 그 노력이 ‘고려인삼’이란 국제적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고려인삼’이란 단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의 사람들을 중국과 일본 소비자는 신용한 것이다.
브랜드는 현대 마케팅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 늘 있었다. 천년 전에도, 백년 전에도, 오늘에도 사람들은 상품의 품질을 평가하고, 그 품질이 좋으면 그 상품을 만든 사람들을 믿고, 그 사람들이 새롭게 만든 상품도 역시 믿고 샀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브랜드가 된 것이다. 다만 현대에는 그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그 상품의 포장에 적힌 상품명이 그 사람들을 대신해 그 상품의 신용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기업 경영에서 ‘브랜드 마케팅’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것 같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그 브랜드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는 과정과 이유를 보지 않고, 브랜드 자체만을 강조하고 그 가치를 따져보는 것에 너무 몰입하면 그 브랜드의 수명은 짧아질 것이다. 브랜드는 회사의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기업의 연구소 전문가들이 경쟁사보다 탁월한 기술 역량을 쌓아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공장 근로자들이 성실하게 품질 기준을 지켜서 생산하고, 마케팅 부서의 마케터가 진실된 마음으로 소비자에게 그 상품의 특징을 전달하고, 영업사원들이 소비자가 편리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유통망을 만드는 등의 노력이 그 상품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것이다. 사원들의 합치된 노력이 없으면 브랜드는 크지 않는다.
기업 경영자가 자기 상품의 브랜드 가치를 높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브랜드’라는 추상적 단어에 몰입하기보다 사원들의 역량을 증대시키고 사원들과 함께 품질에 관한 철학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면 그 브랜드는 자연스럽게 소비자들 사이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2013년 10월 23일
CEO 에세이
살고 있는 주변의 산을 걸으면서 산과 나를 구별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사람도 지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실감한다면 우리는 알피니즘의 순수한 세계를 넓힐 수 있다.
알 피니즘은 1800년대 알프스의 산악인들이 거벽(巨擘)을 등반하던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나름대로 등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사람의 기운 만으로 인공적인 장비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산과 바위를 해치지 않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도전하던 산악인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마터호른·아이거·그랑조라스의 알프스 3대 북벽에 도전하면서 돈도 명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도전 그 자체로 의미를 느꼈던 위대한 산악인들의 정신이 바로 알피니즘이다. 대놓고 자랑하지 않음은 물론 어떤 무명의 산악인은 그곳을 등정했다는 것을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A를 A를 위해서 할 뿐, A를 B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순수성이 그들의 혼이었을 것이다.
이런 알피니즘은 최근 들어, 특히 히말라야 등반에서 많이 퇴색됐다고 한다. 가이드와 포터에 의존하고 산소통을 물지 않으면 등반이 힘든 고산 등반을 하면서 도전 그 자체보다 등정·성공·경쟁이란 속세적 가치를 지향하는 등반에서는 원래의 알피니즘 정신을 찾기 어렵다. ‘도전’은 있으나 ‘순수성’이 조금은 퇴색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 달에 한 번 이상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약 1800만 명(등산지원센터 자료)이라는 통계도 있다. 집 뒤나 학교 옆의 야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그중 절반에 달하고 약 40%가 근교의 명산을 오르고 약 10%가 암벽이나 리지 등반을 즐기고 있다. 이들에게도 알피니즘이 있을까.
알피니즘의 핵심 정신인 ‘순수성’만을 생각하면 집 뒤 야산을 걷는 사람에게도 알피니즘은 있을 수 있다. 낮은 야산이라도 그 속을 걷는 것이 좋아, 북한산이라도 땀 흘리며 걷는 그 자체가 좋아 산을 오른다면 그들의 마음은 1800년대 거벽을 도전한 산악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산에 가고 싶어서 산에 간다’면 그 자체가 아마추어적 알피니즘이다. 명예나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자랑하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면, 건강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고 산행 자체가 좋아 조금 무거운 배낭 속에 장비와 식량을 넣고 길 옆 계곡에서 불어오는 향기로움에 눈길을 주고 작은 풀잎이라도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산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순수성이 있다.
최근에는 인공 암장을 만들고 산이 아닌 도시에서 시멘트벽을 오르는 경기가 많다. 어떤 산악인은 그것이 무슨 산악 활동이냐고 비판한다. 일리가 있는 비판이다. 그러나 그 인공 암장을 오르는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이곳을 오르고 싶다’, ‘해보고 싶다’는 도전 정신이 있고 그 오름을 달성하는 순간의 기쁨이 있다면 그것 역시 순수성일 것이다. 1등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상패와 상금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도전도 우리는 값지게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연 훼손으로 인해, 인간의 세속적 욕망으로 인해, 이제 우리는 고산과 거벽에서의 알피니즘을 만나기가 쉽지 않게 됐다. 그러나 살고 있는 주변의 산을 걸으면서 산과 나를 구별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사람도 지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실감한다면 우리는 알피니즘의 순수한 세계를 넓힐 수 있으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많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5월 31일
CEO 에세이
국민의 건강은 암이나 당뇨병, 고혈압 문제만이 아니다.
교통사고 예방에 사용되는 예산의 적어도 2분의 1은 우울증 치료 예산으로 사용돼야 한다.
우울증, 삶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상실한 사람들. 잠을 못 자고 식욕이 없으며 사는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하루 이틀 그런 것이 아니라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우울증 증상을 보인다. 안 자고 안 먹고 사소한 것에 버럭 화를 내는가 하면 갑자기 각막의 일부가 흰색으로 바뀌면서 엄마 아빠에게 욕을 퍼붓고 물건을 집어던진다.
여성 중에서 이러한 장기적 우울증을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앓는 사람이 네 명 중 한 명, 남성 중에서는 약 10%다.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 결과는 대체적으로 자살이다. 우울증 환자 중 2분의 1이 자살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약 15%는 자살로 삶을 끝낸다. 그 자살은 대개 투신이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 가족·친구들의 얘기다.
우리나라의 2010년 사망 원인 중 1위가 암, 2위가 심장 질환, 3위가 뇌혈관 질환, 4위가 자살(1년에 1만 명 인구 중 3.2명이 자살로 사망)이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숫자의 약 세 배에 달한다. 10년 전에 비해 자살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는 연간 2.5배 늘어났다. 그 주원인이 우울증이다.
우울증에 동반되는 장애가 ‘공황장애’다. 스스로 심장의 박동이 중단된다고 느끼고 허파 속에서 숨이 나오지 않는다고 판단해 ‘나는 이제 죽는다’는 두려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증상이 공황장애다.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의 과장급 이상 의사에게서 공황장애 진단을 받으려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그만큼 환자가 많다.
우리 주변에 딸이나 아내가 우울증으로 자살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는다. 적어도 네 집 중 한 집에는 우울증 환자가 있는 데도 말이다. 내 딸, 내 아내가 우울증 환자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신과 병원을 잘 찾지 않는다. 공황장애와 같은 우울증의 말기 현상에 이르도록 우리는 자신의 가족을 방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료 선진국의 종합병원에서는 ‘정신과’가 가장 바쁜 곳 중 하나다. 시각이나 청각 혹은 뇌 기능의 이상 질환을 갖고 있는 환자가 병원에 오면 당연히 정신과 의사와 협력 진단을 한다. 안과 의사나 청각 의사가 그 환자를 치료하는 처방을 내리기 전에 정신과 의사의 자문을 구한다. 정신과의 상담과 치료가 동반돼야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만연하고 그로 인한 자살률이 매년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우리의 의료 정책의 변화가 절실하다. 국민의 건강은 암이나 당뇨병, 고혈압 문제만이 아니다. 교통사고 예방에 사용되는 예산의 적어도 2분의 1은 우울증 치료 예산으로 사용돼야 한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이제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국가적인 시책이 마련돼야 할 때다.
우선 ‘우울증’에 관한 보건복지부의 홍보가 필요하다. 우울증이란 정신 질환이 초기에는 감기와 같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라는 것을, 의사를 찾아가면 약물로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우울증이 결코 창피하거나 숨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계몽해야 한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도움도 절실하다.
그다음 ‘우울증’ 진료에 대한 건강보험료 수가의 인상이 필요하다. 정신과 의사가 병원에서 더 대접받을 수 있어야 정신과의 진료가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우울증 가족에게 우리 모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고 정부는 우울증 환자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기를 앞당겨야 할 의무가 있다.
2013년 5월 3일
CEO 에세이
장애인을 일반인처럼 대하고 장애인에게 너도 일반인처럼 살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보다 장애인들이 장애인들끼리 모여 즐겁게 직장 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이 올바른 장애인 고용 모델인 것 같다.
기업이든 공공 기관이든 전체 종업원의 2.3%는 장애인을 채용해야 한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장애인고용부담금이란 벌금을 정부에 내야 하는데, 그 금액이 2008년에 1400억 원, 2010년에 1500억 원, 2011년에 2100억 원이었다. 장애인 고용이 거의 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는 김모 양은 조사회사에서 천공 일을 한다. 비장애인 7명과 매일 설문지를 보고 정해진 양식에 따라 컴퓨터로 숫자를 입력하는 작업이다. 언뜻 봐도 보통 사람의 표정과 좀 다른 느낌이다. 그의 업무 공간은 일반인에 비해 청결하다. 정돈이 잘돼 있다.
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철저함’이다. 그만큼 ‘폐쇄성’도 강하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싫어하며 기분이 좋지 않으면 일체의 의사소통을 중단할 때가 많다. 어머니·아버지와도 그렇다. 그러니 직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주어진 일은 성실하고 철저하게 하지만 사람들과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 인상을 준다. 누군가 자기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데, 매일 그런 상황을 여러 번 겪는다. 그래서 서너 달 일하고 그만두는 이가 많다.
보수, 동료와의 즐거움, 일에서의 보람, 이 세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뤄야 그 직장 생활이 즐거운데, 법적 강제력을 동원한 장애인 고용은 사업주에게도, 장애인에게도 이 세 가지의 조화를 주지 못하고 있다. 강제적인 제도의 결함이다. 그 안에는 진실성이 적다.
성수동 12층 빌딩의 1개 층에 한 사회적 기업이 있다. 이 사회적 기업 안에는 최신 복사기와 제본기가 있다. 발달장애 청소년 70명과 비장애인 7명이 같이 일하고 있다. 기업이나 공공 기관으로부터 서류 복사와 제본 및 명함 인쇄를 인터넷으로 주문 받고 그 서류들을 주문처에 배달하는 용역이 이 기업의 한 사업이다.
또 다른 사업은 기업체가 원하는 원두커피를 사다가 최신 설비로 커피를 볶고 포장해 그 기업에 배달하는 사업이다. 복사하고 제본하는 일, 커피를 사오고 볶는 일은 비장애인들이 한다. 발달장애인이 하는 일은 배달이다. 비장애인 한 명이 장애인 7명과 함께 배낭에 복사 서류와 커피 봉지를 넣고 지하철을 타고 배달한다.
여기서 발달장애인들이 배달해 주고 받는 보수는 근태 상황, 지시 준수, 다른 직원과의 인화 정도에 따라 월 120만 원에서 150만 원 사이다. 일반 기업에 취직한 발달장애인보다 두 배 이상의 보수를 받는다. 이 사회적 기업은 적자 운영이 아니다. 사장의 급여도 월 300만 원쯤 된다.
이 사회적 기업이 채용하고 있는 발달장애인의 직장은 여기가 아니라 주문하는 기업체다. 기업체는 그만큼의 장애인고용부담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장애인에게도 좋고, 부모에게도, 기업체에도, 사회적 기업에도 좋다.
이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 중에서 리더가 생기기도 하고 일을 잘하면 배달 업무에서 사무 업무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 부모는 더욱 즐겁다. 아이가 취직도 했고 집에서 나가니까 부모가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돈도 상당히 벌고, 또 직장에서 다른 발달장애인들과 즐겁게 어울리기도 한다. 고마운 일이다.
장애인을 일반인처럼 대하고 장애인 에게 너도 일반인처럼 살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보다 장애인들이 장애인들끼리 모여 즐겁게 직장 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이 올바른 장애인 고용 모델인 것 같다.
2013년 3월 12일
CEO 에세이
죽음은 생명의 모습이 아니다. 죽음은 생명이 생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살면서 죽음을 상상한다는 것은 좀 건방진 생각인지도 모른다.
“내, 당신과 죽을 때까지 같이 살리라”와 “내, 당신과 살 때까지 같이 살리라”는 같은 뜻일까. ‘살 때까지’는 아무 때나 헤어지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 때나 헤어지겠다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나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하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하고 불쾌해지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내가 사는 동안 모든 것을 다해 당신과 함께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에게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다. 사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삶이란 살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죽으면 그만인 것이 아닌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심근경색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턱 주변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면서 점차 어깨 아래로 통증이 내려오고 식은땀이 나면서 가슴 전체가 답답해진다. 그러면서 ‘이것이 죽는 것이구나’라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런 통증이 느껴지면 곧 누어서 다리를 소파나 의자 위로 올리고 머리를 심장보다 조금 낮추고 긴 호흡을 천천히 하면 10분이 안 돼 입술에 따뜻한 기운이 돌면서 ‘이제 살겠다’는 느낌이 온다.
의사들 이야기로는 머리에 피가 부족해지면 두뇌에서 심장에게 ‘야, 빨리 움직여. 나한테 피가 올라오지 않아’라는 명령을 내리는 호르몬이 나온다고 한다. 심장은 자기가 터지는 줄도 모르고 그 호르몬의 명령대로 피를 뿜어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심장이 터지면 죽는 것이다. 이럴 때 거꾸로 누우면 다리와 내장의 피가 머리 속으로 들어가 두뇌는 그 호르몬의 분비를 멈추게 된다. 심장은 다시 정상적인 박동으로 바뀐다. 이것이 사는 것이란다.
두뇌는 사람의 장기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부분이고 심장은 가장 헌신적인 장기라고 한다. 내 몸속에 있는 것이지만 나는 두뇌보다 심장을 사랑한다.
그럴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후의 천당과 지옥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으니까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또 어떤 사람은 ‘내게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내가 없어지는 것인데, 내가 없고 나서 무슨 두려움이 있나. 다만 나는 살아야 한다. 왜? 지금 살고 있으니까. 나는 살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사는 것보다 사는 힘을 다해 살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 같다. 죽을힘을 다한다는 것은 실은 논리적 모순이다. 죽을힘을 다할 바에야 살 힘을 다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사후를 생각하기보다 현재의 삶을 더 중시하는 것이 혹시 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사람에게 생명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니까 선물일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의 생명이나 벌레·짐승·풀과 나무의 생명도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 살 때까지 산다.
죽음은 생명의 모습이 아니다. 죽음은 생명이 생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살면서 죽음을 상상한다는 것은 좀 건방진 생각인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과 죽을 때까지 같이 있을 것이란 표현보다 나는 당신과 살 때까지 같이 있을 것이라는 표현이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방식인 것 같다.
2013년 1월 4일
CEO 에세이
친절과 친근. 무엇이 더 손님들에게 이곳을 다시 오게 하는 것일까. 친절이 정성스럽게 예의를 갖춰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라면 친근은 예의를 별로 갖추지 않지만 상대방을 기분 좋게 웃게 만드는 태도다.
서울 도시 한복판의 5성급 호텔에 가면 현관에 두툼한 코트를 입은 호텔 직원 세 명이 군 보초처럼 서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도 두 명, 후문에 또 두 명이 있다. 호텔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한다. 정중해 보인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갈 때마다 그들의 표정은 늘 근엄하다.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왜 여기 서있을까. 심심풀이로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정중하게 나를 화장실 바로 앞까지 배웅하고 오른손 손바닥을 들어 남자 화장실 도어로 안내한다. 이런 것을 하는 사람들일까.
경기도 가평 손두부 음식점이다. 차에서 내려 맨드라미 꽃 사이로 난 자갈길 6~7m 앞에 현관이 있다. 식당은 165㎡(50여 평), 신발을 벗고 오르면 두껍고 오래된 나무 마루가 깔려 있다. 손님도 별로 없다. 그런데 음식 주문을 받으려고, 주문한 음식을 주방에 알리려고 그들은 양손을 허리까지 올리고 종종걸음으로 뛴다. 왜 뛸까. 하여튼 재미도 있고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자 하는 것 같다. 웃음이 난다. 쳐다보고 씩 웃으니까 그 아주머니도 씩 웃는다. 그리고 또 다른 테이블로 뛴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운동화 상점에 가도 스포츠 복을 입은 종업원들이 넓은 매장을 뛰어다닌다. 손님이 “여기요”하고 부르면 냅다 뛰어온다. “신어보고 싶은 운동화, 마음대로 신어 보세요”라고 한다. “이것 260짜리 있어요?” “찾아올게요”하고 종업원은 또 뛴다.
신발을 찾아 거의 전속력으로 뛰어온다. “여기 있어요.” 그들은 뛰어오면서 손뼉도 친다. “손뼉은 왜 쳐요?” “제가 여기 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요.” 그의 표정은 마치 소년처럼 명랑하다. 무엇이 저렇게 신나는 것일까. 운동화를 신어 보면서 웃음이 난다.
가끔 세미나 행사에 가 보면 접수대 뒤와 옆에 검은색 옷으로 차려 입은 아가씨들이 도열해 있다. 내방객들에게 최고의 존중을 보이면서 “명함 있으면 여기에 넣어 주세요.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가서 또 존중의 표정을 잔뜩 짓고 서있다.
친절과 친근. 무엇이 더 손님들에게 이곳을 다시 오게 하는 것일까. 친절이 정성스럽게 예의를 갖춰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라면 친근은 예의를 별로 갖추지 않지만 상대방을 기분 좋게 웃게 만드는 태도다. 그 운동화 본점의 영업 사원 교육 자료에는 “친절보다 친근이다”는 구절이 맨 앞쪽에 적혀 있다.
“도다리 세꼬시 한 접시 주세요.” “도다리가 다 떨어졌는데요”하는 음식점과 “요새 도다리 물이 안 좋아 없습니다. 대신 참숭어와 방어가 제철입니다. 오늘 들어왔습니다”하는 횟집 중 어디가 장사가 더 잘 될 것인지는 뻔하다.
사회주의국가, 독재국가, 군사정부 국가에서는 규율과 예절을 강조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친절’이 덕목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좋아하고, 나와 너의 구별을 별로 하지 않고, 규율과 예절보다 우정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친근감’이 있다.
상대방을 마음으로 위하고 그 마음을 그대로 얼굴과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들, 손님에게 거리감이 없는, 손님을 편안하게 즐겁게 해 주는 판매원의 말투, 손님의 생각을 미리 짐작해 손님에게 거절보다 권유하는 장사꾼들의 마음속에는 늘 친절보다 친근감이 있는 것 같다.
2012년 12월 7일
CEO 에세이
시간과 사람을 금액으로 환산하는 문화가 기업에 정착될 때 그 기업은 성장을 지속하고 직원은 조금이라도 더 즐거운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경제성장률 2.5%.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 의존도 43%, G20 국가 중 가장 높다. 한국의 내년도 경제성장률 3.0% 미만. 현실이다. 중국의 성장률도 7.0%를 넘기기 어렵다. 정부의 인위적인 경기 부양책은 오히려 나라 살림과 기업 경영에 혼란을 줄 것이다.
소비자의 소득과 지출이 거의 증가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업의 핵심 경영 도구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소비의 보수화 시대를 선언한다. 소비의 보수화 시대에는 우선 대중적 고급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가 줄어든다. 1인당 4만 원이 넘는 한우 고기 음식점의 손님이 준다. 예약을 해야 했던 유명 한우 고깃집이 요새는 그냥 가면 된다.
승용차 사용 기간이 7년에서 10년, 아니 15년까지 늘어날 것이다. 가전제품의 대체 수요도 감소한다. 소비자들은 내구재를 좀 더 오래 사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루고 애프터서비스를 적극 이용한다. 대중매체의 광고 효과가 약화될 것이다. 소비자는 간접적 정보인 광고보다 직접적 정보인 기존 사용자의 평가와 의견에 더 영향을 받을 것이다.
신제품의 일시적 ‘대박’ 현상도 이제 보기 어려워 질 것이다. 신제품이 기존 제품에 비해 그 성능과 품질이 월등히 뛰어나지 않으면 소비자들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상품을 선택한다. 인터넷의 정보와 판매망은 더욱 더 확산될 것이다. 기업의 경쟁은 이제 죽음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모범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일본의 소비 보수화 시대는 우리보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일본 기업 역시 경영의 보수화를 벗어나지 못해 일본의 세계적 기업들이 하나둘씩 그 브랜드력을 상실하고 있다.
소비의 보수화 시대에서 저성장이라도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업은 보수의 탈을 벗어야 한다. 기업은 더욱 혁신성을 강조해야 한다. 소비 보수화 시대에서 기업 경영의 핵심 도구는 효율성이다.
원가를 줄이고 인원을 감축하는 보수적 효율성으로서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불경기가 기회라고 해서 이때 부채를 일으켜 투자하고 신제품 개발에 몰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한 경영은 관념론자들의 허상이었을 뿐이다.
종업원 500인 이상 기업의 모든 종사자 중 생산직과 노무직이 차지하는 비율은 30%다. 70%가 사무직·기술직·전문직·관리직이다. 소위 화이트칼라다. 이제 기업은 공장의 생산성 증대뿐만 아니라 이 화이트칼라 집단의 역량과 효율성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는 시기에 직면하고 있다.
화이트칼라 집단의 효율성 증대를 ‘네오 에피션시(neo-efficiency)’라고 명명한다. 사원 한 명 한 명의 지속적 역량 평가와 역량 증대, 업무 위주의 멘토링 문화의 전사적 확산, 조직 전체의 시간 비용(time cost)의 섬세한 측정, 인적·시간적 낭비 요소의 제거, 시행착오의 예방. 이러한 인적·시간적 효율성 증대 경영이 기업의 지속적 저성장의 축이 돼야 한다.
시간이 걸리는 경영 방식이다. 화이트칼라의 인적 효율성 증대는 1~2년에 이뤄지기 어렵다. 적어도 3년 이상 모든 사원이 효율성(E=P/C)이란 경영의 핵심 도구에 동참해야 인적 역량이 증대될 것이다. 시간과 사람을 금액으로 환산하는 문화가 기업에 정착될 때 그 기업은 성장을 지속하고 직원은 조금이라도 더 즐거운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10월 26일
CEO 에세이
우리말이 위기인 것 같다. 사람들 말 속에 영어와 한자가 한글과 뒤섞여 그 뜻이 모호하고 어지러울 때가 많다.
“설탕은 저기 있으십니다.” 1만5000개가 넘는 커피 전문점에서 종업원들이 안내하는 말이다. 설탕에 존대를 하는 세상이다. 손님에게 더 공손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생각에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어색하다. 텔레비전 수다 프로그램에 나온 탤런트가 “저희 어머님께서 여행을 다녀오셨는데요…”라고 한다. 누구는 “저희 부친께서 젊으셨을 때, 고생을 많이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남들 앞에서는 자신의 가족을 존칭어로 부르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 어머니가요…”라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친근감이 느껴지는 말투다. 혹시 어머니를 “엄마”라고 집에서 부른다면 “우리 엄마가요”라는 것이 오히려 더 공손하게 들린다.
직장에서도 사장 앞에서 자신 부서의 부장을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장에 대한 실례이고 “저희 부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장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다. 자기 회사 임원회의 때 참석하지도 않은 상대방 회사의 상무를 “김○○ 상무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자기 직장 상사가 듣기에 괘씸하게 느껴진다. “너만 공손한 놈이냐?” 한다.
우리말이 위기인 것 같다. 사람들 말 속에 영어와 한자가 한글과 뒤섞여 그 뜻이 모호하고 어지러울 때가 많다.
우스갯소리로 물이 영어로 “셀프”라고 한다. “커피 테이크아웃 두 잔 주세요.”, “리필이 되나요?” 이제는 모든 사람이 쓰는 단어가 되었다. 혹시 “갖고 가게 커피 두 잔 주세요”, “공짜로 다시 채워 주나요?” 이렇게 말하면 잠시라도 두 사람 사이가 즐겁지 않을까?
자동차 내비게이션에서 “잠시 후 좌회전하세요”, “삼백 미터 앞에서 우회전 후 5킬로미터 이상 직진하는 경로입니다”라고 한다. 그 대신 “여기서 왼쪽으로 가세요”, “삼백 미터 앞에서 오른쪽으로 틀어서 5킬로미터 이상 곧장 가는 길입니다”라고 하면 어떨까. 꼭 그렇게 한자를 써야 하는 것일까. 한자를 쓰면 더 정중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혹은 아직도 한자를 써야 ‘유식한 사람’이 된다고 인식하기 때문일까.
종로구청 앞에 ‘구민과 공존하는 종로구청’이라는 선전 문구가 있다. ‘종로구 주민들 모두를 도와주는 종로구청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실감나는 것 같은데 말이다. 대부분의 한자는 추상적인 뜻을 갖고 있다. 그 뜻이 모호하고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우리말은 행위적인 뜻이 많다.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고 누구에게나 같은 뜻을 전달하는 좋은 말이 한글이다. 그리고 다행히 ‘한글’은 한글이다.
공직자들이 국민에게 “…을 당부 드립니다”라고 한다. 당부(當付)라니? 당부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단단히 부탁”한다는 뜻이다. 그 말을 흉내 내어 신입 사원이 선배에게 “…을 당부합니다”라고 한다. 직장인이라면 자신이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말해야 한다. 남들 말 흉내 내는 사원에게 무슨 창의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부 내륙 고속도로에서인가 ‘굴길’이라는 안내 간판을 본 적이 있다. “터널이 아니고 굴길이라고 써 놓았네. 굴길? 맞아, 굴길이지.” 우리가 쓰는 한자도 물론 한글이다. 사업과 문화 영역에서 국경과 민족의 굴레가 벗겨지고 있는 세상이다. 외래어도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쓰는 한자나 영어의 원래 뜻을 사전에서 찾아 보고 제대로 사용하고 들어야 사람들끼리의 마음이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8월 14일
CEO 에세이
내 아이는 스물일곱 살이다. 그런데 간신히 ‘아빠’, ‘엄마’라고 말한다. 밥은 스스로 숟가락을 사용해 먹지만 먹는 것보다 흘리는 것이 더 많다. 글씨를 쓰기는 한다. 하지만 엄마나 아빠만 알아 볼 수 있는 정도다. 두 돌쯤 되었을 때, 아이가 이상한 것 같았다. 병원의 진단은 자폐증 장애 1급. 그때부터 나와 아내는 25년을 이 아이에게만 매달렸다. (사)한국장애인부모회 노석원 부회장의 독백이다.
자폐(自閉)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남들로부터 닫아 버리는 증상이다. 부모는 그래도 엄마와 아빠에게만은 아이가 자신을 내보여 주기를 원하지만 아이는 밥 먹고, 대소변 가리고, 졸릴 때 이외에는 엄마 아빠에게도 자신을 닫아버릴 때가 많다. 성년이 되어서 체모가 생기면 그것을 뜯어 버린다. 내 몸에 무엇 하나 붙는 것이 싫어서다. 친구가 있을 턱이 없다. 자폐증 어린이의 부모는 아이를 특수학교(모든 학생이 장애 어린이인 학교)이든 특수 학급(초·중·고 일반 학교에서 장애 어린이들로 만 구성되는 학급)이든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부딪치고 놀면서 사회성을 갖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자폐 어린이에게는 친구가 없다. 그 표정이 무서워 비장애 어린이가 가까이 하지 않고 자폐증 어린이들끼리는 더욱 무관심한 표정뿐이다. 도대체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될까. 과연 살 수는 있을까. 그래서 자폐아의 부모는 ‘내가 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나라의 등록 장애인 수는 약 250만 명(전체 인구의 약 5%)이다. 그중 발달 장애라고 부르는 뇌병변 발달 장애, 지적 장애, 자폐 장애가 약 50만 명이다. 나머지 장애인 200만 명의 대부분(130만 명)은 후천적 지체 장애(팔다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이며 시각 장애가 25만 명, 청각 장애가 또 25만 명이다. 이들 중 약 70%가 50세 이상이다. 지체·시각·청각장애인은 다른 사람들과 나름대로 의사소통을 하고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자폐성 장애는 80%가 19세 이하다. 오래 살지 못한다.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한다. 길거리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다. 집 안에만 있다. 심한 아이는 20여 년 동안 집 화장실 안에서만 산 사례도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부분 선천성이다. 부모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사는 아이들이다.
이제 발달 장애 어린이와 그 가족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지원하고 그 권리를 보장하도록 하는 법안이 19대 국회 제1호 법안으로 접수됐다. 새누리당 장애계 비례대표 김정록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자다. 고맙다. 이 법안에는 발달 장애인도 한 인간으로서 생존권을 유지하고 감정과 감성을 표현하면서 가족과 함께 어쩌다가라도 웃는, 그래서 그 부모가 한순간이라도 행복을 느끼도록 정부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명시하고 있다. 재원 확보의 방법과 그 예산을 발달 장애 가족에게 투명하고 공정하게 전달하도록 하는 제도도 제시돼 있다.
발달 장애 자식을 데리고 오늘도 공원을 산책하는 아빠들이 있다. 어쩌다 웃는 아이의 표정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을 던져버리는 부모가 있다. 발달 장애 가족에게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격려해 주기를 호소하며 이 법안이 속히 국회를 통과해 우리 사회에서도 발달 장애인이 한 인간으로서 그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2012년 6월 27일
CEO 에세이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은 구청장이나 군수가 아니다. 그들이 그들의 지역구만을 위해 국회 활동을 한다면 우리의 정치는 국회의원들 간의 자기 지역만을 위한 예산 배정 다툼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여야의 의석수에 대한 유감이 아니다. 누가 당선되고 누가 낙선돼서 유감인 것은 더욱 아니다.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당선 소감에 대한 유감이다. “저를 지지해 주신 지역 유권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욱 지역의 의견을 경청하여 지역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는 그 말이 유감이다.
국회의원이 동장인가? 이장인가?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은 구청장이나 군수가 아니다. 그들이 그들의 지역구만을 위해 국회 활동을 한다면 우리의 정치는 국회의원들 간의 자기 지역만을 위한 예산 배정 다툼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20여 년 전, 지금은 작고한 원로 국회의원이 이런 탄식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중앙 정치에서 활약한 중진인데, 지역구에 거의 내려가지 못해 조사 회사에 지역 민심을 좀 상세하게 알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사 결과 (가)지역은 “마을 앞에 다리를 놓아 달라”, (나)지역은 “버스 노선을 동네 앞으로 지나가게 바꾸어 달라”, (다)지역은 “마을 회관을 새로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원로 의원은 “이 보게, 국회의원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참 딱하네”하고 한숨을 쉬면서 그 속을 토로했었다. 아직도 그 의원의 솔직한 탄식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번 총선을 10여 일 앞두고 서울시의 한 국회의원 후보자를 만났다. 그는 우리나라 교육에서 석차를 없애는 것이 자신의 정치 목표라고 했다. 지금 초등학교 성적에는 석차가 없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석차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다. 석차를 매겨야 하기 때문에 모든 학생이 똑같은 문제지로 시험을 볼 수밖에 없고 그러면 모든 교사가 똑같은 교육을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교육이 공교육을 위협하고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같다. 중·고교 과정에서 기본 항목은 같은 교재로 같은 공부를 하되 상당 부분은 교사가 교육 목적에 따라 교재를 달리 선택하고 강의 내용도 다양하게 한다면 우리의 학생들은 다양한 지식에 접하게 되고 그래서 더 수준 높은 창의성을 갖게 될 것 같았다.
국회의원의 핵심 책무는 나라의 미래를 위한 정책을 구상하고 그 정책이 시현될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국민 모두의 공통적인 과제가 있다. 출산-육아-교육, 취업-창업-근로, 가정과 주택, 휴식과 여가 생활, 인간관계와 문화 등등.
어떤 국회의원들은 교육정책 전문가로서, 누구는 주택 문제에 관해, 누구는 가정의 화목에 대한 연구를, 누구는 우리 사회의 신뢰와 화합을 위한 정책과 법을 제안해야 한다. 각 국회의원은 하나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전문 분야에서 정부의 독주를 억제하고 행정가와 정책 토론을 해서 더 많은 국민을 위한, 더 밝은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총선에서는 유권자가 국회의원 후보에게 “당신은 어떤 국가적 과제의 전문가인가. 그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고자 하는가. 그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산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는가”를 묻고 판단했으면 좋겠다. 기업의 임원들이 그러한 것처럼.
2012년 4월 25일
CEO 에세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나는 왜 그것을 하고 싶은가. 나는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확실한 자기 대답을 하고 그렇게 사는 삶, 그 안에 열정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열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몸과 마음속에 열정을 갖는 방법에 관한 논의는 많지 않은 것 같다.
30대 후반 남자가 서울시에서 10년 동안 작은 인쇄 공장을 하다가 문을 닫았다. 인쇄 주문이 없기 때문이다. 노량진 전셋돈을 빼서 김포시의 작은 집을 다시 전세, 이사했다. 전세 차액이 1억 원. 아내와 아들 둘과 같이 살아야 한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여러 곳을 둘러보다가 1억 원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을 찾았다. 프랜차이즈 닭갈비 음식점이다. 김포시를 뒤져서 목이 괜찮은 점포를 찾았고 한 달 동안 인테리어를 맞추고 9개의 테이블을 갖춘 닭갈빗집을 열었다.
그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주방은 당분간 장모님이 맡았고 그와 아내는 손님상에서 닭갈비를 볶는다. 이제 이것이 그의 직업이다. 닭갈비 음식점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그가 선택한 그의 일이다. 닭갈빗집 운영은 그가 사는 이유다. 그의 몸과 마음속에 열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행복을 느낀다. 가난해도 좋다. 힘들어도 좋다. 그는 그가 선택한 그의 일이 있기 때문이다.
열정은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자기 자신에게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을 때 생긴다. 그 대답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으면 열정은 생기지 않는다. 상급자가 시켜서 하는 일, 그냥 돈을 벌기 위한 일, 늘 하던 것이니까 지금도 하는 일,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직장에서 쫓겨날 것 같아서…. 이런 삶에는 열정이 없다.
예순이 넘은 여자 가수가 온 몸으로 무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누가 보아도 그녀는 열정적이다. 콘서트가 끝나고 탈의실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웃는다. 행복을 느낀다.
“나는 가수다.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은 분명하며 나는 살아있는 동안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내일 내가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유는 내가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삶도 있고, 되고 싶은 것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 삶,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힘을 들이는 삶도 있다. 어느 삶이든 열정이 있어야 갖고 싶은 것을 갖고, 되고 싶은 것이 되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매일매일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삶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지만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한 삶이나 되고 싶은 것이 되기 위한 삶에는 그런 열정이 배기 어렵다. 갖고 싶은 것을 갖고 나면 또 다른 것을 갖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되고 나면 또 다른 지위와 명예의 자리에 오르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은 욕망과 비슷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은 욕망과 좀 다르다. 그것은 그 자체가 삶이다. 그런데 문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나는 왜 그것을 하고 싶은가. 나는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확실한 자기 대답을 하고 그렇게 사는 삶, 그 안에 열정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2012년 2월 29일
CEO 에세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토론회를 갖도록 하고 선생님이 “그래, 그게 더 좋겠다”라고 말하는 학생에게 토론 점수를 1점 더 주면 어떨까.
텔레비전 심야 토론은 시작한 지 20년 가까이 되었다. 처음 할 때에도, 지금도 여권 두 사람, 야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국민을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주장만 100분 동안 반복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다가 끝낸다. ‘환경 대 개발’, ‘4대강 살리기 대 4대강 그냥 두기’, ‘보편적 무상급식 대 단계적 무상급식’…. 그때그때 사회적 이슈에 관한 토론이 거의 모두 그러했다.
이게 무슨 토론인가. 말싸움이지.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 토론만 보고 자랐다. 그래서 그들이 30대, 40대가 된 지금 그들도 똑같은 토론을 한다. 말싸움에서 지면 안 된다는 것만 보고 배운 것이다. 따지기 잘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란 착각을 대한민국 도처에 전파한 것은 ‘토론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어제 발달장애인지원법에 관한 토론회에 갔었다. 6명의 토론자 중 두 명이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한쪽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발달장애인들을 적극적으로 모으고 ‘운동’을 통해 힘을 키워서 법을 만들고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쪽은 내년에 총선·대선이 있으니 현재 정부의 복지 정책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는 법을 전문가들이 속히 만들어 총선 전에 국회를 통과시키는 것이 발달장애인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제1 토론자는 그렇게 법을 만드니까 우리 복지 정책이 엉망이 되고 공급자 위주가 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힘을 규합하고 조직의 결속력을 먼저 강화한 다음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은근히 제2 토론자를 무슨 이권을 바라고 저러지 하고 믿지 못한다.
어른이 되면 사람들은 신념을 갖게 된다. 나의 신념은 정의로운 것이고 너의 신념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나는 순수한 신념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데, 너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실상은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위선자로 몰아세운다. 신념이란 것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일까. 대중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 ‘자기실현’ 욕망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다. 토론에서 나와 다른 주장을 들으면서 “아, 그렇기도 하겠다”, “그런 방법도 있구나”, “그래 그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토론회를 갖도록 하고 선생님이 “그래, 그게 더 좋겠다”라고 말하는 학생에게 토론 점수를 1점 더 주면 어떨까. 말싸움이 아니라 합의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에서 서로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초등학교 교육 때부터 시작돼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크면서 대학생이 되어 동아리 회의 때에도 “그래 그게 더 좋겠다”, 회사에 들어가 판매 방법 토론에서도 “그래, 그게 더 좋겠다”, 시민사회 대표가 되어 다른 단체의 다른 주장을 경청하면서 “그래, 그게 더 좋겠다”, 정치가가 되어 상대방 국회의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 그게 더 좋겠다”…. 이런 세상이 올 수는 없을까. 우리 주변부터, 가족부터, 친구들과 만나 “그래, 그게 더 좋겠다”를 오늘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상품 이름, 상품 포장에도 “그래, 그게 더 좋겠다”를 표시하는 기업이 나오기를 바란다.
2011년 12월 21일
CEO 에세이
여론조사는 현재의 민심을 파악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민심이라도 제대로 파악하면 여론조사는 그 구실을 다한 것이다.
서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언론에서 발표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서로 다르다. 여론조사는 현재의 민심을 파악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민심이라도 제대로 파악하면 여론조사는 그 구실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왜 언론사마다 현재 민심의 조사 결과가 다른 것일까.
한국마케팅여론조사협회에 가입된 조사 회사의 수는 43개다. 협회는 윤리 강령에 회원사들이 ‘조사를 빙자한 여론의 유도 혹은 왜곡’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이들은 적어도 조사 의뢰자의 정치적 수단이 되고 있지는 않다. 숫자를 일부러 고치는 조사 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의 사원이 개인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게 되고, 그러면 곧 ‘그 회사는 엉터리 조사를 한다’는 소문이 나서 회사의 문을 닫게 되기 때문이다.
서울시 유권자는 약 835만 명이다. 그들을 모두 조사할 수 없으므로 모두 조사한 결과와 거의 비슷하게 1000명 정도의 응답자를 선정해 설문하는 것이 표본조사다. 그러니 표본의 모집단 (전수) 대표성에 따라 조사 결과가 달리 나온다.
서울시에 약 350만 가구가 있는데, 서울시 전화번호부에 기재된 집 전화번호의 수는 133만 개다. 따라서 집 전화번호를 이용해 교과서대로 체계적으로 표본추출해 전화 면접을 한다고 해도 전화번호부에 기재되지 않은 약 200만 가구의 유권자는 표본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조사하면 표본의 대표성이 없는 조사가 된다.
두 번째, 02라는 서울시 번호 다음에 집 전화의 국 번호와 전화번호를 100-0001번부터 9999-9999번까지 컴퓨터를 이용해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조사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RDD(Random Digit Dialing: 무작위로 번호 걸기)라고 부른다. 이렇게 전화하면 전화번호를 등재하지 않은 집에도 전화를 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매일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사람, 집 전화가 아예 없는 사람은 응답할 수 없다. 이 방법 역시 대표성에 문제가 있다.
그 다음, 휴대전화로 전화해 설문 조사를 하는 방법이다. 서울시 유권자 중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의 수는 1.0%도 되지 않는다.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의 수는 집 전화번호를 등재하지 않은 사람(50% 이상)이나 밤늦게 돌아오는 사람(10% 이상), 혹은 집 전화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약 15%)보다 훨씬 더 적다. 그런데 문제는 휴대전화 번호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번호와 그 주인 이름을 통신회사에서 공개하면 법적으로도 개인정보보호법에 위배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사 회사에서 그래도 대표성이 조금 더 높은 RDD 방법을 많이 이용한다. 좀 더 세련된 표본추출 방식은 서울시 전체 유권자의 지역·성·연령·직업·소득·학력 분포와 똑같게 되도록 수만 명의 서울시 유권자를 사전에 만나 휴대전화로 여론조사를 할 터이니 응답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 명단을 만들어 그들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조사하는 방법이다. 다만, 이런 방법을 이용하자면 미리 많은(수억 원 이상)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2011년 9월 28일
CEO 에세이
예상, 예보…. 이런 것들은 현대사회에서 과학적 근거로 제시하는 참고 자료일 뿐이다. 그것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현재의 상황일 뿐이다.
일기예보. ‘내일 오전 서울은 흐리고 한때 비가 오겠습니다. 강수 확률은 50에서 70%, 예상 강수량은 5에서 20mm입니다’. 이런 일기예보를 모두 듣고 골프장에 모였다. 아직 비는 오지 않고 있다.
“야, 오늘 비 온대!” “안 올 걸.” “나도 안 올 것 같은 데.” “아냐, 지금은 이렇지만 일기예보에서 온다고 했어.” “일기예보를 믿니? 전에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고 18홀을 돈 적이 있어.”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그 속에는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과 비가 온다고 내가 예측했으니 비가 와야 한다는 ‘신념’이 섞여 있다.
회사 임원 두 명이 김포 공항으로 중요한 바이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시간 맞춰 마중 가야 한다. 김 전무는 양재동에서 남부순환도로를 거쳐 88도로로 들어가자고 하고 박 상무는 운전사에게 그래도 한남대교를 거쳐 88도로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니 그쪽으로 가라고 한다.
둘은 가는 길을 두고 더 다퉜다. 서로 자신의 예측이 옳다는 것이다. 네 예상은 틀릴 것이라고 서로 자신한다. 운전사는 나름대로 한남대교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오늘 따라 강남대로가 뻥 뚫려 있다.
김 전무가 박 상무에게 “당신 생각대로 한 것이 다행이야. 오늘 강남대로에 차가 별로 없네”라고 인정하면 그 둘은 친구가 된다. 반대로 김 전무가 마음속으로, “어, 이거 웬일이야. 강남대로에 차가 없잖아. 쪽팔리네, 후배 앞에서. 아마 곧 막힐 거야. 역시 남부순환도로로 갔어야 해”라고 생각하면서 강남대로가 막히기를 바란다면 그 둘은 원수지간이 될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시간 맞춰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김 전무의 목표는 강남대로가 막히는 것이다. 내 예상이 더 잘 맞고 네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렸다.
박 상무 역시 마중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예상한 것이 옳았고 네가 예측한 것이 틀렸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렸다. 둘은 차 안에서 속으로 서로 상대방을 저주(?)한다. 이런 일은 우리 주위에 가끔 일어나곤 한다.
일기예보, 역시 마찬가지다. 예보는 지금의 상황으로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 예상은 급작스러운 상황으로 변경될 수 있다. 황해에서 갑자기 돌풍이 생겨 서쪽에서 오던 구름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고, 그래서 한반도 남쪽은 파란 하늘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료에 의한 예상이 개인의 희망·기대·신념보다 정확할 확률이 높지 않은가. 기상청에서 여러 가지 주변 날씨 정보로 (과학적으로) 예상한 강수 확률이 50~70%이면 비가 올 것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데 강수량이 5~20mm라면 골프를 하지 못할 정도의 폭우는 오지 않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예상, 예보…. 이런 것들은 현대사회에서 과학적 근거로 제시하는 참고 자료일 뿐이다. 그것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현재의 상황일 뿐이다. 예상은 예측이 아니다. 예상은 언제나 틀릴 수도 있다. 개인적인 희망·기대·신념에 의존해 결정하는 것보다 자료를 이용한 시나리오적 판단이 많은 사람에게 편안함을 줄 것이다.
2011년 8월 31일
CEO 에세이
택시미터에 3200원이 나왔다. “저기 차병원 사거리 지나기 전에 내려주세요.” 미터는 3400원. 1만 원짜리를 운전사에게 주면서 “6000원만 주세요.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다.
5년 전인가, 택시미터에 3100원이 나왔는데 운전사가 잔돈 7000원을 준 적이 있다. 100원. 아주 작은 돈이지만 참으로 고마웠다. 그다음부터 1000원 단위로 택시비를 낸다. 작은 돈으로 운전사와 나는 그날 하루 기분이 좋다.
화장실 종이 수건. “한 장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총무팀 사원이 붙여 놓은 글이다. 바꾸라고 했다. “필요한 만큼 쓰세요.” 여직원이 “어떤 사람은요, 이 종이 수건을 통째로 가져가요. 아르바이트하는 아줌마가요”라고 한다.
“그럼, 그런 사람이 못 가져가게 해야지. 이렇게 비꼬는 듯한 글을 붙여 놓으면 누가 좋다고 하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수도 뒤의 거울에 “손을 두 번 터세요. 종이를 적게 써도 됩니다”라는 문구를 붙여 놓았다.
모교 사회학과의 발전기금을 모으는 책임을 맡았다. 1년 전에 시작했다. 2013년이 50주년이어서 그때까지 목표액이 7억 원이다. 졸업생이 3000명, 연락되는 교우가 1000명쯤 된다. e메일·전화·우편으로 약정서와 발전기금 규정을 보냈다.
한 명이 한 달에 평균 2만 원을 기부하면, 1년에 2억4000만 원이 된다. 3년이면 7억 원가량이 된다. 그 정도는 모일 줄 알았다. 그런데 1000명은커녕 20명도 기부금을 약정하지 않았다.
1억 원을 약정한 교우가 한 명, 3000만 원을 기부한 동문이 두 명, 그리고 몇 명이 100만 원씩 내서 1년 동안 2억 원을 약정 받았다. 금액은 목표액에 거의 도달했지만 모두 같이 동참하자는 호소는 여지없이 무시당하고 만 것이다.
“왜 내가 모교 사회학과 발전기금을 내야 하느냐?”, “그 돈 어디에 쓰려고 그러느냐?”는 질문에 당황했다. 청계산 옛골에서 버스를 탔는데, 1만 원짜리밖에 없다. 그것도 달랑 한 장.
운전사에게 미안해서 “저 돈이 없는데요”라고 말했다. 버스 뒷자리에 있던 등산복을 입은 청년이 오더니 자기 교통카드를 카드 리더기에 가져다 댄 후 “아저씨 그냥 가세요”라고 한다. 그날 오후 내내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택시비 거스름 돈 400원, 버스비 1000원, 월 기부금 2만 원. 화장실 종이 한 장…. 누구에게는 큰 액수이고 누구에게는 작은 액수일 것이다. 합리적으로 따지자면 택시요금의 거스름돈은 받아야 하고, 남의 버스비를 내 줄 필요가 없고, 내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모교에 기부금을 낼 이유가 없고, 작은 것이라도 아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되씹어 보면서 내가 과연 합리적인지 아니면 인색한 것인지 생각해 볼만하다. ‘인색’은 행동이기보다 마음이다. 인색한 마음은 습관이 될 수도 있다. 인색한 습관을 갖고 살면, 노년이 되어서 괴롭다.
내 것을 너무 아끼면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삶이 즐겁지 않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주장한다. 내 것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주변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 이런 비합리적인 말이 있지 않던가? “내 것을 남의 것처럼 아껴라!”
2011년 6월 15일
CEO 에세이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집어 던지고….”
후다닥 봄이 왔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이었는데, 하루 만에 봄이 왔다. 우물 속에 들어 있다가 튀어나온 것처럼 봄이 왔다. 그 봄의 따뜻한 기운에, 동네 처녀들의 몸속에서 겨우내 숨어 있던 지방분이 타 오른다. 그 에너지를 어찌하지 못하고 처녀들은 읍내로 달린다.
시인 오세영 선생님은 “산천은 지뢰밭인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 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라고 노래했다. 처녀들의 가슴살에서 터지는 지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계산 자락 비탈에 누가 주인인지 모르는 밭이 있다.
그 밭을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가만히 바라보면 오세영 선생님의 지뢰밭이 보인다. 작은 흙 방울 사이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쳐든 연녹색의 생명, 그 생명에 붙어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움직임, 그놈들을 잡으러 가는 개미의 무리, 흙 속에서 부글거리는 미생물들, 미생물을 삼켜버리는 나무뿌리, 힘차게 솟구치는 줄기 속의 분수, 나붓거릴 듯 말 듯한 초록의 생명들이 전쟁을 시작한다. 삶의 힘이다. 생명의 환희다.
청계산 굴다리 안, 구청이 마련해 준 비닐 장터에 아줌마와 할머니들이 모였다. 바가지와 쟁반에 두릅·냉이·쑥·취·원추리를 담아 놓고 수다 아닌 수다를 떤다. 아이들 얘기다. 사위와 며느리 칭찬도 섞인다.
봄은 강에도 왔다. 영월의 동강. 산자락을 천천히 흐르며 돌다 여인의 속살보다 더 희고 고운 모래톱에 안긴다. 모래톱은 강물 안의 작은 생명들에게 쉴 곳을 찾아 준다. 생명들은 그 속에서 아기도 낳고 키운다.
작고 가는 새끼 물고기들이 재빠르게 모래톱을 휘젓는다. 강의 생명들은 모래톱 속에서 그들의 생명을 지키고 다른 생명을 돕는다. 이렇게 자라고 크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우리도 그렇게 살아 온 것은 아닌가.
이 땅의 사람들은 300만 마리가 넘는 소와 돼지를 몇 달 만에 땅속에 묻었다. 소·돼지가 잠실야구장에 꽉 차면 5만 마리나 될까. 잠실야구장에 소·돼지를 가득 채우고 그들을 죽이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런 짓을 60번을 반복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가.
봄이 되면 얼었던 그 시체가 녹는다. 녹은 피와 살이 강을 오염시키고 사람이 먹는 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만이 문제일까. 모래톱을 파헤치고 그 속의 작은 생명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 살생이다. 비단, 인간에게 불리하고 유리함만 따질 것인가.
곡선의 부드러움과 여유. 그것은 감성만이 아니다. 생명은 굽이굽이 도는 물과 길에서 호흡하고 먹이를 찾고 몸은 쉰다. 빠른 물, 직선의 길은 위험하다. 몸도 마음도 여유를 갖지 못하고 격류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좀 느리면 안 될까. 좀 쉬면 안 될까. 좀 양보하면, 좀 손해 보면 어떤가.
기생충이 숙주를 죽이면 저 자신도 죽는다. 그런 기생충을 우리는 바보라고 부른다. 인간의 숙주는 지구다. 그런데 그 숙주인 지구를 이렇게 망쳐 버리고 저는 잘 살겠다고 우길 수 있을까. 인간은 지구에 기생하고 있다. 그 인간을 위해 지구를 좀 그대로 놓아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구, 그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스스로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 생명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닐 것이다. 생명, 누구의 생명이든 생명 앞에서는 모든 생명이 겸손해야 할 것 같다. 봄이 되어, 그 생명들이 흙속, 땅 위, 모래톱 안과 밖에서 생명으로서의 기지개를 켜는 시절에 생명에 대한 생명으로서의 겸손을 느끼고 싶다.
2011년 3월 9일
CEO 에세이
62kg. 그것도 60년을 넘게 썼으니 중고품 중에서도 하급에 속한다. 고기 값으로 치면 아마 50만 원도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가 이 고기를 원하겠는가. 원하는 상대방이 없으면 나의 고기 값은 1원도 안 된다. 오히려 이 고기를 처분하는데 누군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빚이다.
당신과 같이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나는 당신에게 사직을 권하지 않겠다. 그 한 사람을 찾아와라.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당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원이 한 명만 있어도 당신은 이 회사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혼자 일하고 혼자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귀하는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지식? 귀하는 후배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연구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귀하의 지식을 그들이 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귀하의 지식은 귀하만을 위한 자랑의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귀하의 지식을 그들이 배워서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고, 업무 효율성을 높인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지식일 것이다. 용기? 부드러울 때 부드럽고 단호할 때 단호할 수 있는 귀하의 용기.
그 용기 자체를 사람들은 칭송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칭송 받음’으로 끝날 것이다. 그 용기가 그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조직을 강하게 만든다면 귀하의 용기 있는 행동은 그들에게 가치 있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 가치는 얼마짜리인가. 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어야 가치가 된다. 경영자는 대강이라도,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육성된 사원의 역량, 그 용기로 인해 높아진 사원의 사기를 금액으로 환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가치도 돈으로 환산될 수 있을까. 조직 사회에서 순직한 사원에 대한 보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다. 그러나 그 차별적 보상이 각 생명에 대한 차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순직한 그 사원이 그동안 회사에 기여한 점, 업무 과다로 그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그 후 가족에게 줄 수 있었던 금전적·정신적 제공 등을 따져 순직 보상금이 결정된다. 이것은 삶과 죽음, 인간의 생명에 대한 차별적 보상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치가 서로 다름에 따른 보상이다.
사람의 생명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가치다. 사람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구제역 병에 걸려 살처분되는 수 십만 마리의 소와 돼지의 생명도, 전쟁으로 죽는 사병의 생명도, 그것이 생명인 한 그 가치는 똑같을 것이다. 생명은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는 모두 다르다. 그 사람이 살거나 죽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 모두,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가치는 모두 같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는 그 사람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줄 수 있는가에 따라 사람들은 상대방의 가치를 정한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감성적·물질적·심리적인 것이든 간에.
나는 얼마짜리인가. 고기 값으로 치면 정말 얼마 안 된다. 생명의 가치는 인간이 논할 바가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 다른 사람이 나에게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얼마짜리인가에 따라 현재 나의 값이 매겨질 뿐이다. 인간 평등은 환상이다. 인간은 생명과 무관하게 모두 불평등하다. 모두 그 현재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직 생활을 하는 한 우리는 매일 그 가치를 올리면서 살아야 한다.
2011년 1월 19일
CEO 에세이
가을,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 바람이 불면 스산한 기분이 들고 햇볕을 쬐면 따스함을 느낀다. 한반도의 가을은 참으로 아름답다. 들판에 펼쳐진 황금색 물결은 마을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저녁연기와 어우러져 어린 때의 추억을 더듬게 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가을이 되면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런데 그 외로움이 마음의 외로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날씨가 싸늘해지면 피부 밑에 기름기가 적은 사람은 붙어 있던 그 피부와 속살이 떨어져 그 피부 신경이 외로움을 두뇌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낙엽, 단풍, 황금색의 논바닥, 저녁연기와 외로움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물질적·육체적인 신경회로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정말 그럴까. 자꾸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외로움이 아니구나. 생리적 현상이구나. 낭만도 아니고 쓸쓸함도 아니구나. 소변 마려운 것과 같은 현상이래”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한다. 피부에 영양제를 바르면 없어지는 것이 ‘가을의 외로움’. 그렇게 여기면 그런 것 같다.
“엄마, 색깔이 뭐야?”라고 묻는 네 살짜리 딸에게 “색은 원래 빛 속에 있는 것인데,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야”라고 설명하면 웃기는 일이다. 대신, 엄마가 여러 종류의 색종이를 들고 “이리 와 봐.
색에는 이렇게 빨강·파랑·노랑·검정·보라색이 있어. 이것 봐, 다른 색깔도 많잖아?”라고 보여 주면 아마 그 아이는 “응, 그렇구나”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열일곱 살 딸이 “아빠, 사랑이 뭐야?”라고 질문할 때 생리학자인 그 아빠가 “우뇌 세포 중 돌연변이로 생긴 특정 세포가 유전적으로 진화되면서 발생시키는 호르몬이 있다. 사랑은 그 호르몬의 분비로 말미암아 생기는 신경적 현상”이라고 설명하면 역시 웃기는 일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돌연변이적 세포와 그 호르몬의 발생은 유전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우성적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남성은 사랑하고 싶어 하고 여성은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고 싶어 한다고 하는데, 실은 여성의 몸은 사랑 따위와 아무 상관없는 ‘자존심’이라는 세포로 꽉 차 있을 뿐이다.
그 자존심 때문에 여성은 위대한 남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그 사실 자체를 기분 좋아하는 것이지, 남성이 느끼는 사랑의 감성은 유전적으로 여성에게는 거의 없다”고 하면 더욱 웃긴다. 그런데 그런 말을 웃긴다고 치부해 버리지 말고 가끔 그렇게 믿는 것이 위안도 되고 삶의 여유도 갖게 해 주는 때가 있다.
즐겁고 기쁠 때에는 마음이 그렇다고 믿고, 고통스럽고 외롭고 쓸쓸할 때에는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이 그렇다고 여기면 그런 고통이 없어질 수도 있다. 결국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느끼는 신경계통의 현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불안하고 기분이 나쁠 때, 거꾸로 매달려서 3~4분 있으면 그런 불길한 생각이 없어지기도 한다. 두뇌 속에 피가 많이 흐르면 기분이 좋아지기는 하는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모욕을 받았다고 느껴질 때, 땀을 흘리며 달리면 그런 모욕을 받았다는 생각이 없어지기도 한다. 땀은 피부를 위한 좋은 화장품뿐만 아니라 마음의 화장품이기도 한다.
행복 주사라는 것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물질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래, 까짓것 그런 거야”라고.
2010년 11월 24일
CEO 에세이
그대들이 하는 말을 기록할 문자가 없어서 참 답답하겠다. 그래서 내가 그대들이 쓸 문자를 이렇게 만들어 주니, 이제부터는 그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않아도 이 문자만 익히면 그대들의 생각과 말을 쉽게 적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기록으로 남겨 놓을 수도 있게 된다.
또한 그대들이 나에게 전달할 것이 있으면 종이에 이 문자로 적어 보내면 내가 볼 수 있다. 그러면 나도 그대들의 생각을 멀리 앉아서라도 알 수 있으니 그대들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마도 이것이 세종의 바람이었으리라. 세종은 사대부들이 그들의 이익 때문에 차단했던 백성과 임금의 대화를 원했던 것 같다.
태국이나 중동 국가에 가면 그들의 문자가 있다. 꼬부라진 그림 같은 것과 그 위와 아래에 점이 찍혀 있는 그들의 문자를 보면 ‘도대체 이 문자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의문이 생긴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한글로 적힌 신문·간판·책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문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중 하나가 한글이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말을 하지만 그 말을 적을 그들만의 문자가 없어 영문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는 우리의 문자가 있다고 말하면 잘 믿지 않는다. 아마 중국어의 한 종류라고 짐작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한글은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보존하고 더 잘 쓰고 확산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우리의 자산이다.
출근하는 도중 공사장 안내판에 “우리 공사장에서는 소음과 먼지를 발생시키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그 문장 아래에는 공사 책임자와 담당 행정청의 책임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저는 우리 공사장에서 소음과 먼지를 발생시키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으면 그 책임자들이 훨씬 더 각오를 느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커피 파는 곳에서 점원이 “설탕은 저기 있으십니다”라고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사원이 “사장님 넥타이가 참 멋있으십니다”라고 한다.
우리는 한글 문법을 배운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냥 쓴다. 한자의 발음을 한글로 적은 단어는 한자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외래어일 뿐이다. 특히 법을 다루는 관공서의 한글 문장에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일본식 한자가 너무 많다.
초등학교 3학년 한글 시험에 “불행한 일이 겹치고 또 겹침이란 사자성어는?”이란 문제와 ‘설( )가( )’라는 답지를 주고 그 괄호 속을 채우라는 지시문이 있었다.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선생님이 낸 문제다. 참으로 똑똑한 한 꼬마가 ( ) 속에 ‘사’를 적고 그 다음 ( ) 속에 ‘또’를 적었다. 시험문제를 낸 선생님과 그 답지를 쓴 학생 중 누가 더 똑똑한지 모를 일이다.
소위 ‘다문화 가정’이 많이 생기고 있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도 많다. 그들의 자식들도 부모와 같이 한국에 산다. 우리는 그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수 있을까. 필자더러 한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한글을 가르치라고 하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를 것 같다. 한글의 문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기껏 영어의 문법에 맞춰 한글 문장을 다시 고칠 뿐이다.
한글을 다시 배우면 어떨까. 내일 책방에 가서 ‘한글 문법 초보’라는 책을 찾아보고 싶다. ‘외국인에게 한글 가르치는 방법’이란 책이 있음직도 하다. 인터넷에서 그런 책을 사서 공부하고 싶다.
2010년 9월 22일
CEO 에세이
노익상 한국리서치 사장에게 물었다. “마케팅에 무슨 비법이 있나요.” 35년 경력의 리서처이자 마케터인 노 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비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본은 있죠.” 기자가 다시 물었다. “그게 뭔가요.” 노 사장이 기자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노 사장은 국내 리서치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32년 전 단돈 3만8000원과 직원 한 명으로 한국리서치를 설립했다. 한국리서치는 연매출 500억 원대, 200여 명의 정규 사원이 일하는 우리나라 굴지의 리서치 회사로 성장했다.
노련하고 실력 있는 베테랑 노 사장이 ‘사람’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품을 만드는 이도 사람이고, 상품을 파는 이도 사람이고, 상품을 사는 이도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마케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난해하다.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 노 사장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했다.
체험의 폭 크게 넓혀야
“가령 중국 쓰촨성에 휴대전화 마케팅을 하러 갔다고 칩시다. 먼저 그 지역 소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을 알아봐야지요.
몇 시에 일어나고,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그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상품을 구매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한편의 영화처럼 그릴 줄 아는 마케터가 훌륭한 마케터입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무슨 특별한 노하우라도 있는 것일까. 노 사장이 얘기하는 첫 번째 방법은 ‘체험’이다. 체험이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이다.
“마케터나 리서처가 다뤄야 할 것이 눈에 보이는 제품이든 보이지 않는 서비스든 간에 자신이 먼저 사용해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어요. 직접 보고 냄새를 맡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시작할 수 없어요.
아니, 시작해서도 안 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목에 걸리지 않는 연기’를 느낄 수 있으며, 맥주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이 ‘목욕 후 마시는 맥주 한잔의 맛’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체험은 한정적이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다. 더구나 시간도 부족하다. 노 사장은 직접 체험이 어려운 것은 간접 체험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과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사람들의 삶을 다뤘어요.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른 삶의 스타일과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다양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체험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체험도 중요하지만 마케터에게는 ‘통계’라는 훌륭한 무기가 있지 않은가. 노 사장은 “통계는 통계일 뿐, 그 속의 사람을 봐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예를 들어 A라는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데이터가 나왔다고 치죠. 그 데이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응답자가 좋아하는 이유를 알아야 해요. 그걸 알고 제품을 만들고 광고 전략도 세워야 합니다. 사람을 잃어버린 통계, 전략을 위한 통계는 실제 마케팅에서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브랜드의 의역(意譯)은 ‘신용’
노 사장은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언젠가 서울 외곽 도시에 백화점을 세우겠다는 한 대기업의 타당성 조사를 의뢰받았다고 한다. 상권의 구조, 타깃 고객의 특성, 기존 경쟁 백화점의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 방법, 상품 구색 등이 조사 항목이었다.
연일 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보고회를 가졌다. 보고회가 끝나고 나서 백화점 사장이 “백화점 지을 자리에 가보셨습니까?”라고 넌지시 물었다. 노 사장은 그 질문에 “아찔했다”며 “현장에 가보지도 않고 숫자만 늘어놓는 것은 위험하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노 사장은 마케터는 ‘발상의 전환’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마케터들은 소비자들이 제품을 ‘선택하는 이유’보다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개 마케터들은 제품을 ‘선택하는 이유’에 집중하는데, ‘선택하는 이유’를 알면 기분은 좋지만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선택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엔 기업 이미지, 디자인, 품질 등 소비자의 답변이 두루뭉술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면 답변이 구체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남녀 관계에서도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야 반성하고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들라고 하면 답변이 구체적이에요. 예를 들어 휴대전화의 경우 ‘미끄럽다’거나 ‘영문 자간이 좁다’는 등의 지적이 많이 나옵니다. 그걸 개선하는 것이 제품의 품질을 높이고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빠른 길입니다.”
사람을 아는 것도, 발상의 전환이 자유로운 것도 마케터가 가져야 할 역량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용’이라고 노 사장은 강조했다. 노 사장은 “브랜드의 의역(意譯)은 ‘신용’”이라며 “마케터는 결국 신용을 얻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뢰는 기업의 영속성을 좌우하는 잣대와 같은 것이다. 소비자의 신뢰를 얻으면 전쟁터에서 백만 대군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한킴벌리나 풀무원 같은 회사가 대표적이다.
사람과 신뢰를 최우선시하는 노 사장다운 논리다. 한국리서치를 국내 굴지의 조사 회사로 키운 비결도 결국 노 사장의 ‘사람 경영’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갖고 기업을 경영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노 사장의 경영 철학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소설과 영화를 많이 봐라”
노익상 사장은 마케터가 소비자만 알아서는 ‘반쪽짜리’라고 지적했다. 기업 내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려면 그들의 고민이나 노력, 바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뛰어난 마케터가 되기 위해서는 기업내 사람들과 소비자의 성향을 함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노 사장의 첫 번째 주문이다. 아울러 “제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제품의 특징을 보여주지 않고 감성적인 호소에만 의존하는 광고는 모두 제품 콘셉트가 없고 카피만 튈 뿐이라는 것. 팔려는 물건을 제대로 알아야 포장이 자연스럽고, 설득력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 사장은 “좋은 제품을 이기는 방법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그만큼의 가격을 더 받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체험’도 노 사장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중요한 팁(tip) 중 하나다. “소설과 영화를 많이 봐야 합니다. 사람들의 진짜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체험을 더 확대하고 깊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소설과 영화입니다.”
2010년 7월 14일
CEO 에세이
김○○ 초선 국회의원은 거의 매일 다섯 번의 축사 일정이 있다. 그래서 그는 한 모임에서 축사하고 청중들의 박수를 받고 곧 그 자리를 떠나 또 다른 행사장에 가서 축사를 한다. 이렇게 3년을 살았다.
그리고 드디어 재선에 도전하는 선거철이 왔다. 그런데 그를 진심으로 도와 줄 친구 한 명이 없다. 선거 자금, 조직, 홍보 대행사를 관리해 줄 유능한 참모가 단 한 명도 없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산악 단체의 회장도 1주일에 대여섯 번의 행사에 참석해 한국 산악계를 대표해 축사와 시상을 하고 어떤 때는 먼저 간 산악 동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해야 한다. 그는 참석은 하되 축사·시상·조사를 가급적 본인이 하지 않는다.
본인이 꼭 해야 하는 경우에는 아주 짧게 인사말만 하고 주된 연설은 부회장 중 한 명이 하도록 요청한다. 영예스러운 일, 남들에게서 칭송 받을 수 있는 기회마다 그는 그 자리에 나서지 않는다. 대신 그는 소중한 친구를 얻는다.
고선지 장군이 전쟁터에서 적군의 화살에 허벅지를 맞은 병사를 보았다. 그는 즉시 말에서 내려 그 병사의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손으로 뽑고 입으로 허벅지 피를 빨아 화살의 독을 뱉어 내었다.
병사는 감격해 시골에 있는 노모에게 이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알렸다. 그랬더니 그 노모가 통곡했다고 한다. 이웃 사람들이 이런 좋은 소식에 왜 통곡하느냐고 물었다. 노모는 “내 자식은 그 전쟁터에서 죽을 것입니다. 고선지 장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고 죽을 것이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단다.
기업의 설립자가 산악계의 그런 부회장, 고선지 장군의 그런 병사와 같은 임원 두 명만 있으면 서비스업으로는 500명의 사원으로 연간 1000억 원의 매출과 10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릴 수 있는 회사를 즐겁게 운영할 수 있다.
기업(企業)의 한자는 ‘사람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터전, 마당’이라는 뜻이다. 기업의 성패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주인이 모든 사원을 육성할 수는 없다. 기업의 주인이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임원이다. 소위 ‘내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에 대한 충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주인에게 충성만 하고 부하 직원들에게는 강압적인 임원이 회사에 있으면 그 회사는 쇠퇴한다. 그런 임원들은 무능한 사람들이다. 조직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다. 기업의 주인은 ‘내 사람’을 만들되 그 임원들을 나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하들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이 하도록 인사고과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기업주가 ‘내 사람’, 즉 사원들이 도움이 된다고 평가하는 임원을 갖게 되면 그 다음으로 그 임원이 회사 업무에 열정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주인의식’을 강요하는 기업주는 허망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주인의식을 요구하는 기업주는 사원들이 비웃는다.
‘지가 준 게 뭐가 있는데, 나를 보고 주인이 되라고 하는가?’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 아닌가. ‘주인의식’이니 ‘가족’이니 이런 해괴망측한 단어 대신에 임원들이 열정을 갖도록 도와야 기업이 성장한다.
열정은 의지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열정은 욕심이 아니다. 열정은 ‘내가 지금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확신에서 나온다. 수없이 그런 자문을 하고 자답을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자기 신념이다. 기업주는 사석에서 회사 임원들과 “당신은(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토론해야 한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확신, 도덕적인 것이든, 감성적인 것이든, 의무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부귀영화를 제외하고) 그러한 자기 확신에서 열정이 나온다. 그 열정에 관한 사사로운 이야기를 임원들과 나누는 기업주는 행복한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2010년 7월 7일
CEO 에세이
마케터는 무엇으로 살까. 신제품이나 서비스의 대성공에서 오는 희열일까. 아니면 기존의 강자를 넘어설 수 있다는 승부욕일까. 기업 마케팅 임원과 경영진의 모임인 한국마케터협회(MASOK)는 지난 5월 26일 자신들의 실패와 성공을 담은 책 ‘마케터분투기(리더스북)’ 출간 기념으로 ‘2010 살아있는 마케팅’ 세미나를 개최했다.
MASOK 회장을 맡고 있는 조원익 에스콰이아 사장은 “‘살아있는 마케팅’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마케터들의 고민과 열정, 그리고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노익상 한국리서치 사장, 위규성 CJ 라이온 사장, 권오휴 닐슨미디어리서치 고문, 구교식 한샘 마케팅부 이사 등 4인의 마케터가 후배 마케터를 위한 실전 레슨에 나섰다.
리서치는 마케팅의 필수 요소다. 통계 없는 마케팅은 손전등 없이 밤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 리서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돈 3만8000원과 사원 1명으로 시작”한 한국리서치를 내로라하는 다국적 회사들과 선두를 다투는 회사로 키운 노익상 사장은 “체험”이라고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노 사장은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언젠가 국내 대기업이 추진하는 신규 백화점 입지의 타당성 조사를 의뢰받은 적이 있었다. 상권의 구조, 타깃 고객의 특성, 상품 구색 등의 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기업 임원들과 토론을 벌였다. 토론이 끝나고 나서 그 기업 사장이 넌지시 물었다. “백화점 지을 자리에 가보셨습니까?” 노 사장은 그 순간 아찔했다고 한다. 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클라이언트를 잃었지만 대신 큰 교훈을 얻었다.
기업 전반에 대한 이해 높여야
노 사장은 “마케터는 다뤄야 할 것이 눈에 보이는 제품이든, 보이지 않는 서비스든 간에 자신이 직접 사용해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다”며 “직접 보고 냄새를 맡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노 사장은 “지식은 지식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체험한 사람들 간 차이보다 몇 배는 더 크다는 것이다.
위규성 CJ 라이온 사장은 “소비재 마케터의 어려움이 점점 가중되고 있다”며 “스스로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못 박았다. 위 사장은 1984년 CJ제일제당에 입사해 마케팅 상무를 지냈으며 ‘게토레이’와 ‘라이스데이비누’ 등의 히트 상품 개발에 참여했고 ‘식물나라’와 ‘비트’ 브랜드를 성공시킨 주역이다. CJ 라이온은 생활용품 전문 기업이다.
위 사장이 ‘마케터의 위기’를 대형 마트의 힘이 커지면서 마케터의 고민이 브랜드 관리 같은 전통적인 마케팅이 아닌 거래 쪽으로 많이 쏠리고 있다는 데서 찾았다.
따라서 위 사장은 마케터들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업의 ‘밸류 체인(Value Chain)’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 사장은 “엔지니어링·구매·제조·재무·회계 등 기업 전반에 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둘째, 마케터에서 전략가로서의 변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전략적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환경 변화를 예측해 사업 구조의 틀을 변경하고 외부와의 전략적 제휴를 적극 모색하는 한편 4p 픽스(product, promotion, place, price)보다 전체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전사적 마케팅을 선도해야 한다고 했다. 마케팅을 마케팅 부서에 맡겨서는 원하는 성과를 100%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전사적 시스템을 갖추는 데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논리적인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키워야 한다고 부탁했다. 위 사장은 “데이터를 엮어서 볼 수 있는 ‘가설적 사고’를 익히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다섯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타 부서를 경험해야 한다는 팁도 내놨다.
여섯째, 여성 마케터들은 ‘알파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밤샘·워크숍 등을 겁내지 말고 그 기업 문화에 자신을 맞추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기업 마케터들은 리서치나 광고 에이전시를 활용한다. 좋은 에이전시를 고르는 방법은 뭘까. 신문기자 출신으로 오리콤·한컴·선연 등의 광고 회사를 거쳐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닐슨의 대표를 역임한 권오휴 닐슨미디어리서치 고문은 ‘좋은 에이전시를 고르는 법’으로 6가지를 들었다.
첫째, 능력(Capability)이 있는가. 둘째, 창조성(Creativity)이 있는가. 셋째, 진실성(Integrity)이 있는가. 넷째, 열정(Passion)이 있는가. 다섯째, “노(No)”라고 말할 용기를 가졌는가. 여섯째, 우리 회사 분량이 그 회사 총수입의 4분의 1을 넘지 않는가.
특히 권 고문은 “그 회사 총수입의 4분의 1을 넘을 경우 아부하기 쉽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며 “이런 에이전시는 배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권 고문은 ‘좋은 에이전시를 잘 쓰는 방법’도 함께 제시했다. 우선 에이전시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대해야지 단순한 조력자로 여겨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갑을’ 의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아울러 “가능하다면 많은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고 늘 칭찬하라”고 덧붙였다.
구교식 한샘 마케팅부 이사는 올웨이즈-온(always-on: 항상 접속 가능한) 라인 롱테일 마케팅의 효과와 실전 전략을 소개했다. 롱테일은 80% ‘꼬리’ 상품이 20% ‘머리’ 상품보다 높은 가치를 창출한다는 이론이다.
닷컴·트위터·블로그 등 소셜 미디어를 적극 공략하라는 것이 구 이사의 지침이다. 광고 클릭의 60% 이상이 대형 사이트가 아닌 ‘롱테일’이라고 불리는 사이트에서 일어난다는 조사 결과도 곁들였다.
구 이사는 “정보를 올리는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정보를 구하는 사람도 쉽게 찾을 수 있는 편집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도움말을 줬다. 구 이사는 “방송국을 보유하고 있다”고 여기고 “편집국 역량을 길러서 롱테일을 대상으로 마이크로 마케팅을 전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10년 6월 9일
포브스코리아 칼럼
마케팅의 창시자인 필립 코틀러는 “3년 동안 신제품을 출시하지 않은 기업은 필히 도태될 것이다”라고 단정했다.
새로운 TV CF 편수는 신제품의 출시 정도를 반영한다. 새로운 TV CF는 2002년에 연간 1710건, 2012년에는 3030건으로 10년 동안 1.8배 증가했다. 그러나 2013년부터 매년 줄어들어 2016년에는 2460건, 2017년에는 1980건으로 5년 전에 비하여 35%가 감소했다. 새로운 TV CF의 감소는 바로 신제품 출시의 감소를 뜻한다. 마케팅의 창시자인 필립 코틀러는 “3년 동안 신제품을 출시하지 않은 기업은 필히 도태될 것이다”라고 단정했다. 새로운 CF 편수가 적은 분야가 가구, 컴퓨터, 스낵, 건설, 의류, 가정용품 등이다. 이들 각 제품의 연간 새로운 CF 편수는 전체 편수의 1.0% 미만이다. 가장 많은 분야(새로운 CF 편수의 21% 차지, 2017년)가 오락/취미(entertainment) 산업이다. 가전제품, 음료, 식품, 의약품, 자동차, 통신, 화장품의 비중이 각 3~6%로 중간이다.
광고의 역할은 제품을 처음 사보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한 번 그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한 사람이 품질과 가성비에 만족하여 지속적으로 다시 구매할 때 시장은 비로소 안정된다. 따라서 기업은 신제품의 품질에 자신 있을 때, 재 구매율이 50%를 넘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 때만 광고비를 투자한다. 신제품의 광고비는 6개월 이내에 100억원은 넘어야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광고비가 100억 미만이면 아니하는 것만 못하며, 지나친 광고비는 물론 낭비다. 이런 점에서 신제품에 막대한 광고비를 사용하는 것은 진정한 투자다. 계산된 행동이어야 한다.
구매빈도가 비교적 높고, 재구매자에 의하여 시장이 형성되는 음료, 식품, 화장품 등의 새로운 광고가 적다는 것은 우리 소비재 제조 기업의 활동이 부진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그들에게 신제품을 낼 만한 기술이 없는 것일까? 혹은 소비자의 신제품에 대한 욕구가 줄어든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두려운 것이다. 이 불황기에 신제품을 내고 광고에 투자하기가 불안한 것이다.
분명 무(無)성장에 가까운 저성장 시대다. 소득, 소비, 생산 모두 지금의 상태가 지속될 뿐, 급격한 환경 변화가 없는 한, 어디에서도 성장 가능성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총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시장을 나누어보면 신제품의 성공 가능성이 보이는 곳이 있다. 우선 소비도 생산도 서비스 산업도 부익부 빈익빈의 경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외식산업만 보더라도, 비싸고 고급스러운 극소수 음식점에는 불황이 없다. 또 철저하게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대형 대중 식당도 성장을 지속한다. 구매빈도가 높은 제품일수록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고급 제품과 가성비 위주의 대중적인 제품, 이렇게 시장은 양분되고 있다. 중산층이 적어지면서 중간 수준의 제품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저성장 시대에서 신제품 전략 역시 이 양극화되는 시장을 겨냥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2018년 8월 23일
포브스코리아 칼럼
창문은 열고 닫는 도구다. 그런데 열고 닫는 것 중에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친구 4명이 일본 후지산 밑 시즈오카현에서 6일을 보내고 귀국했다. 오후 3시 인천공항 도착. 워낙 친한 사이라서 그냥 헤어지기가 싫어 청계산 아래 화덕 고기집에 가서 오랜만에 김치찌개와 삼겹살을 먹고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양 박사가 본인은 오후 4시 반에 집에서 손주를 만나기로 했다며 만나고 다시 오겠다고 한다. 저녁 6시가 넘어 그가 왔다. 집에 들어가서 손주를 만나고 집 안도 정돈하고 나오는 길이란다. “아니 그 사이에 청소를 했다고?” “응. 6일이나 그냥 두었으니까 대강 치우고 제자리에 놓을 것 놓고 왔지. 집사람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그냥 두고 살아. 그 사람 성품이지 뭐.”
허, 이 친구 대단하다. 하긴 그가 늘 새벽 6시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진공청소기를 들고 집 안을 도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40년 부부 생활에 집 안 청소를 도맡아 하는 것이 기가 찬 것이 아니다. 자기 아내를 그렇게 이해하고 투정이나 비판하지 않는 그의 너그러움에 감탄할 뿐이다. 그 아내도 대단한 사람이다. 웬만하면 “여보, 그냥 둬요. 내가 치울게요” 할 터인데, 남편의 청소 습관을 그대로 용인하고 있다니 그 또한 인자함이 아닐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창문은 열고 닫는 도구다. 그런데 열고 닫는 것 중에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필자는 창문만 보이면 연다.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사무실의 창문을 열어둔다. 퇴근해 집에 들어가면 모든 창문을 연다. 집 안 공기가 바깥 공기보다 나쁘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창문을 보면 모조리 닫아버리는 사람도 많다. 더워서, 추워서, 위험하니까, 남이 볼까 봐, 먼지가 들어와서 창문은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관을 갖고 있다. 양 박사는 집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리 정돈이란다. 정돈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머리가 복잡해 아무것도 잘되지 않는다며. 그 부인은 정리 정돈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남편의 청소 습관이 불쾌한 것도 아니다. 남편이 청소하면 좋고, 혼자 있을 때는 정돈을 하지 않아서 편하다. 그뿐이다. 그런데 남편은 집 안의 창문을 계속 열고, 아내는 집 안의 창문을 계속 닫으면 좀 곤란하다. 서로에게 불쾌감이나 두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전에 “왜 당신은 창문만 보면 열어요?”, “왜 당신은 그렇게 창문을 닫고 다녀요?”라고 서로에게 한 번 물어보면 어떨까?
사람들은 나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부정적 편견을 갖기가 쉽다. “나는 살갗에 바람이 닿는 느낌이 좋아. 좀 춥거나 더워도.” “나는 늘 혼자 있잖아. 다들 밤늦게 들어오니까. 창문을 열면 괜히 무서워.” 이런 대화 한마디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사랑하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이 안개처럼 사라진다.
2018년 7월 5일
포브스코리아 칼럼
나이 일흔이 되어 대학 66학번 산 친구들과 몽골 서쪽 끝에 있는 알타이산맥의 봉우리를 찾았다.
나이 일흔이 되어 대학 66학 번 산 친구들과 몽골 서쪽 끝에 있는 알타이산맥의 봉우리를 찾았다. 알타이산맥에는 5개 봉우리가 있는데, 최고봉은 후이뚱봉(4370m), 가장 오르기 쉬운 곳이 말칭봉(4025m)이다. 울란바토르에서 비행기로 약 4시간, 울기라는 몽골 서부지역의 중심도시에 내려, 몽골 친구 오스판이 모는 근사한 지프차를 타고 사막과 초원을 이틀 동안 달리고 달려 알타이산맥과 마주했다. 베이스캠프다. 초원이다. 남쪽으로는 수십 킬로미터의 빙하, 서쪽으로는 흰색의 봉우리가 연달아 있는 알타이산맥, 땅은 먼지가 풀풀 이는 흙 밭이 아니라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운 초원이다. 아, 우선 눕고 보자. 이리 좋을 수가 있나. 하늘은 푸르고 등은 부드럽고 주변에는 50년을 산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 그리고 내 말이면 무조건 다 들어주는 오스판이 있다. 무엇이 부러우랴.
정상 등정 당일.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기분 좋은 새벽 안개 속을 필자, 조규배, 김학중, 산악 가이드까지 네 명이 짐을 챙겨 일어서는데 뚱뚱이 오스판이 자기도 가겠단다. 가죽으로 된 두꺼운 모피를 입고 있다. 글쎄 갈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초원이 끝나고 오름이 시작되는 곳에서 ‘빠이빠이’ 인사를 한다. 잘 다녀오란다. 부슬비가 오기 시작했다. 오름에는 길도 없다. 그냥 돌무더기뿐이다. 서너 시간, 돌무더기를 오르니 이제 능선인데 빗방울이 굵어진다. 굵은 빗방울이 우박으로 변하면서 사정없이 얼굴을 후려친다. 오르막길이어서 위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4000m 수준이고 빤히 보이기도 해서 우모복도 안 가져왔고, 여분의 장갑과 양말도 챙기지 않았다. 그런데 빗물이 스며들어 신발 속이 온통 물이다. 장갑을 벗어 짜니 물이 죽 떨어진다. 나도 추위를 느낀다. 얼굴에 소름도 끼치고 이도 약간 떨리는 기분이다. 여기 능선만 오르면 정상이 보이겠지 하면서 겨우겨우 오르는데, 김학중이 “야, 익상아. 내 신발 속이 온통 물이야. 여기서 내려가자” 한다. 조규배에게 슬쩍 물었더니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라고 한다. 능선 한쪽 약간 높은 곳에 잔돌 몇 개를 올려놓고 빗속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다 같이 “여기가 우리의 정상이다”라고 외쳤다.
하산 후에 김학중 왈, “50년 산행에서 가장 보람 있고 즐거웠던 등반이었다”라고 한다. 맞다. 정상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 곳이 정상이다. 삶에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해야 한다. 포기가 습관이 되면 안 된다. 그러니, 애초에 산꼭대기를 목표로 하지 말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을 목표로 하자. 내년 스위스 마터호른봉의 목표는 솔베이 산장이다. 그곳까지만, 그곳까지라도 안전하고 재미있게 다녀오려고 한다. 컴퓨터 배경화면에 중학교 때부터 그리던 그 암봉이 있다.
2018년 5월 29일
포브스코리아 칼럼
60여 명의 산악인이 모였다. 아무도 건강을 위하여 산에 간다고 하지는 않았다.
“너 , 왜 산에 가?” “나? 자연과 하나가 되기 위한 몸부림….” 되돌아선다. 어색해서. 산 친구들끼리 뭐 그런 질문을 하냐? 불쑥 대답은 했지만 왠지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다.
지난 3월 11일 대륜산에서 2018년도 전국산악구조대 워크숍이 있었다. 각 시도 대장, 강사, 임원들까지 전문 산악인 약 60명이 모였다. 아침 9시 얼음골에서 열린 모의 개회식 때 필자는 대원들에게 두 가지 숙제를 주었다. “하나, 나는 왜 산에 가는가? 둘, 나의 알피니즘은 무엇인가? 각자 생각해서 오늘 중 내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주십시오. 우리의 공통분모가 무엇인지 알고, 또 돌연변이 같은 생각도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함입니다.”
대원들이 “뭐 이런 숙제가 다 있어? 뻔한 것 아니야. 그냥 산이 거기 있으니까. 좋으니까 가지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천편일률적인 대답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오후 5시경부터 숙제 풀이가 오는데, 아! 그 진지함, 그 순진함, 그 열정! 컴퓨터 앞에 앉아, 그들의 응답을 내용 분석 방법을 이용해 분류하고 연결하기 시작했다. 기쁨이 느껴진다. 다음 날 완주군 주안면 면사무소에서 워크숍 분임 발표를 하기에 앞서, 산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모아서 알려주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첫째, 산행 동료가 좋다는 것이다. ‘산에 같이 가는 사람이 좋아서.’ ‘그들의 깨끗함이, 그 순수함이 좋아서.’ ‘산이 좋고 선후배들의 정과 의리에 반해서 오래도록 다니고 싶습니다.’ ‘산에서의 의리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내가 선배로부터 배운 기술과 능력을 이제는 후배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시기.’
둘째, 산은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산은 나의 삶이다. 내 삶의 한 부분이다. 취미가 아니다.’ ‘산은 나의 인생, 그 자체다.’ ‘산과 산행은 내 삶의 한 부분, 그것도 아주 중요하다.’ ‘태어나 자란 곳이 산골인지라 산은 친근한 친구이었지요. 오늘도 산에 오르고 부딪치며 결국 인생 마지막까지의 동반자로, 반려자로 남기 위해 오늘도 배낭을 꾸린다.’
셋째, 도전이라는 것이다. ‘나를 찾기 위하여 산에 갑니다.’ ‘나의 도전의 한계는? 나의 능력의 한계는?’ ‘산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찾으러 산에 갑니다.’ ‘20대가 지나 30대에 이르러 보니, 새로운 코스를 계속해서 찾아다니며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체력적으로 기술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시기,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하여 산에 다녔던 것 같습니다.’
산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도전하고 있는 새로운 나, 그런 나 자신이 자연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것, 그러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고 내 옆에도 있다는 행복! 이것이 전문 산악인들이 산을 찾는 이유 같다. 아무도 건강을 위하여 산에 간다고 하지는 않았다.
2018년 4월 4일
포브스코리아 칼럼
회사를 경영하면서 직원들을 칭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8시 30분, 확대임원회의. 출근하면서 오늘 회의 전에 임원들에게 무엇인가 칭찬을 해야 할 텐데, 무엇을 칭찬하지? 누구를 칭찬하지? 누구든 칭찬을 받으면 더욱 일을 잘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칭찬할 근거가 있어야 칭찬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경영에서 떠났지만, 3년 전까지 매주 칭찬할 사건을 찾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숙제였다.
건성으로 칭찬을 하면 신뢰를 잃는다. “이번 주 사업본부 실적이 많이 좋아졌군요. 수고했습니다.” 이런 말은 칭찬이 아니다. 매주 이런 이야기만 반복하면 그 사장은 실없는 사람이란 인식을 받을 것이다.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될 리 없다. 또 근거 없는 칭찬은 모욕이 된다.
칭찬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배가 나오고 가슴 근육이 없던 친구가 매일 근육 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만났을 때, “어쭈, 여기 근육 좀 봐. 너 요새 뭐 하냐?” 이것이 진짜 칭찬이다. 50대 중반이 되어,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당한 아빠. 요즈음 시무룩하고, 엄마하고도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다. 스물이 넘은 딸에게 기분 좋게 한잔하자고 하던 씩씩한 아빠였는데. “아빠, 아빠 팔뚝은 진짜 튼튼해. 이것 봐. 이렇게 두꺼워. 나도 아빠 팔뚝처럼 튼튼한 팔뚝을 가진 남자를 찾을 꺼야”. 총명한 딸이다. 아빠에게 어떤 칭찬을 해줄까 고민하던 중 문득 아빠의 강한 팔 근육이 생각났다. 그 아버지는 다음 날부터, 새벽 운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근거 있는 칭찬만이 칭찬이다.
칭찬의 근거를 발견하고 느끼려면 상대방과 친해야 한다. 현장에서 개인적인 교감을 가져야 칭찬다운 칭찬을 할 수 있다. 설 연휴 마지막 날, 회사에 들렀더니, 컴퓨터 서버실에 불이 켜져 있다. 노크를 하니, 서버 담당 이 과장이 나와 있다. “아니, 휴일인데 나왔네”. “아, 날씨가 추워서 혹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좀 보려고요”. 그다음 주 회의 때, 이 과장의 수고를 임원들에게 알리고, 전산본부의 노고를 치하하니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좋은 사장과 같이 일하고 있구나. 친구가 이번에 도지사 후보로 나온다고 하면서, 여론조사를 부탁했다. 친구의 일이기도 하니, 내가 직접 설문을 만들어 자료수집본부의 전화면접실에 조사를 요청했다. 조사 도중에 결과가 궁금해 담당자에게 중간 집계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메일로 파일을 보내주는데, 열어보니 실시간 집계를 알 수 있는 시스템이다. 어, 이 사람들 봐라. 언제 이런 것을 만들었지? 사장에게 일부러 이메일을 보냈다. “이렇게 휼륭한 시스템을 만들어 쓰다니 대단합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칭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모든 경영자가 아는 사실이다. 현장에 있어야 감탄할 만한 일을 발견한다. 감탄 어린 칭찬만이 진정한 칭찬일 것이다.
2018년 2월 28일
포브스코리아 칼럼
나이가 들면서 깡을 키워야 한다. 깡에는 두 가지가 있다. 육체의 깡이 하나이고, 마음의 깡이 또 하나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나약해지기 쉽다. 특히 남자가 더 그런 것 같다. 우스갯소리지만 여자가 나이들면 필요한 것이 (1)돈, (2)딸, (3)취미, (4)친구인데, 남자가 나이들어 꼭 필요한 것은 (1)마누라, (2)집사람, (3)와이프, (4)애들 엄마라고 한다. 피식 웃음이 나지만 주변에 보면 그런 남자 노인들이 많다. 그만큼 100세 시대가 현실이다. 60이 넘으면 이제 나를 위한 또 하나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다. 손주나 가족들 앞에서도 나는 나, 너는 너인데, 같이 친하게 서로 좋아하며 살자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서로 의존하지 않는, 남에게 매달리지 않는 삶을 살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시기이다.
연말에 동갑내기(70대 초반) 친구들과 경남 산청에 있는 지리산 천왕봉에 다녀왔다. 산에는 처음 같이 갔는데, 그 친구가 잘 걷는다. 꾸준히 걸어 해가 진 후에 램프를 켜고 내려왔다. 그 다음 날 차 안에서 그 친구가 하는 말. "걷는 것이 건강에는 좋을지 몰라도, 걷는 것만으로는 근육이 안 생겨. 근육이 없으면 자신감도 없어져." 느낌이 왔다. 평소에 그 친구를 보면 늘 강단이 있다. 골프를 칠 때에도 해저드를 만나면 우드로 쳐서 공을 곧잘 넘긴다. 그 친구는 70이 되어서 50대 1의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료 사업부 사장으로 취임했고 자동화 공장 건설에도 직접 뛰어들었다. 거의 상품이 시장화될 즈음 느닷없이 하는 말이 "나, 사표 냈어." "아니 왜, 언제?" "일주일 전에. 내일부터 안 나가." 허,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왜 그만두었을까? 아마 사주와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요새 그가 중얼거렸던 "근육이 없으면 자신감도 없어져"라는 말이 다시 생각난다.
나이가 들면서 깡을 키워야 한다. 깡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체의 깡이고, 또 하나는 마음의 깡이다. 몸 깡은 근육을 키움으로 생긴다. 허벅지가 당기도록 계단을 오르고, 허리를 편 상태에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루에 50회는 해야 한다. 허리를 곧게 유지하면서 팔굽혀펴기를 하면 가슴 근육이 생기고, 그 근육으로 단단한 상체를 느끼면 자신감도 생긴다. 마음의 깡도 육체의 깡에서 비롯된다. 근육만으로 마음의 깡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근육이 없으면 마음도 약해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의 깡도 생긴다. 육체와 마음의 단련이다. 다만 그 깡을 표현할 때 조심해야 한다. 조금 참아야 한다. 내적인 깡을 외부에 나타내기 전에 겸손이라는 터널을 한 번 지나야 한다. 겸손이란 긴 굴을 지나온 깡은 부드럽다. 온화하나 나약하지 않다. 입에는 미소를, 눈에는 인자함을, 턱에는 강단이 배어 있는 모습. 그것이 바로 100세 시대 노인의 깡이다.
2018년 1월 30일
포브스코리아 칼럼
마케팅을 우리말로 [신용]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고 정주영 회장의 '너 해봤어?'라는 유명한 질문이 있다. 마케팅이 말로만 떠들고 실제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을 적절하게 비판한 지적일 수도 있다.
마케팅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막 해 팅?'이라는 학자가 있다. 일리 있는 생각이다. 고 정주영 회장의 "너 해봤어?"라는 유명한 질문이 있다. 마케팅이 말로만 떠들고 실제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을 적절하게 비판한 지적일 수도 있다. 그 학자는 그래서 "마케팅은 소비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 기업에 있는 모든 임직원의 행동"이라고 주장하였다. 빗길에 빵을 운반하는 제과 회사 운전수, 호텔 로비를 청소하는 계약직 사원, 고장 난 세탁기를 고쳐주고 가는 기술자, 공장 안에서 불량품을 구별하는 숙련공, 식품의 신선도를 확인하여 구매하는 백화점 MD, 누구든 그의 행동이 바로 마케팅이라는 주장이다.
마케팅의 초기 단계에서는 마케팅은 주로 전략적인 아이디어 창출로, 조직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구별하였다. 그래서 '마케팅'과 '조직의 힘'은 대표이사 앞에서 늘 다투어 온 세력이었다. 두 가지가 모두 강해야 기업은 성공하지만, 기업의 주인은 어느 한쪽에 더 비중을 둘 수밖에 없다. 성공하는 기업가는 대체로 '조직의 힘'에 더 치중하였다. 실행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케터들이 모여 제4차 산업혁명, 소비자 분석, 미래 예측, 소통과 같은 근사한 단어를 두고 토론하고 있을 때 상품의 이동 시간을 10% 단축시킬 수 있는 벨트 소재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이공계 기술자도 있다. 당신이 그 기업의 주인이라면 누구에게 더 고마워할 것 같은가?
필자는 마케팅을 우리말로 '신용'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의 상품, 나의 사람, 나 자신을 고객에게 "저는 이런 이런 사람·상품입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쓸 수 있습니다"고 설명하는 것, 신용 만들기의 첫 번째 단계다.
그 다음, '써 보셨더니 어떠세요? 잘못된 점이 있으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라고 고객에게 시정을 약속하고 수정된 내 상품을 쓰도록 유도하는 것. 그래서 결국 그 고객이 나의 상품만을 계속 사용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신용의 세 번째 단계이다. 끝으로, 그 고객이 스스로 '아무개의 상품은 정말 믿을 만 해' '가격도 좋아' '한번 써보라'고 하며 타인에게 권유할 때가 신용 마케팅의 마무리 단계이다.
마케팅의 그 시작은 '신용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을 범하지 마라! 毋自欺(목민심서 인용). 내가 나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은데, 어떻게 타인에게 나를 믿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신용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에서 시작된다. 신용이 쌓이면 단골이 생기고 단골은 내 기업의 무보수 판촉사원이 된다. 나의 상품·서비스의 재구매자가 30%가 안 되면 망할 징조이고, 70%가 넘으면 더욱 열심히 조업을 하여 그 기업을 크게 성공시킬 수 있다. 그 관건이 신용이다.
2018년 1월 3일